2016.11.30
누군가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누군가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한 마디가 있다면, 그럼에도 그 방법을 모르겠다면, 제주의 숲길로 가자.
에디터 박은경 글, 사진 문유선
솔 길 따라 만나는 제주 축소판
송악산
제주만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집약된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다. 제주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이 산의 이름은 송악(松岳). 101m의 높이에 2중 분화구를 가진 기생 화산, 다시 말해 오름이다. 3km 남짓의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자연이 뽐내는 다양한 매력이 이어달리기하듯 펼쳐진다. 파도 소리, 거센 해안 절벽, 해풍에 춤추는 갈대, 가까이 보이는 형제섬, 멀리 보이는 가파도와 마라도, 분화구에 위치한 목장,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 먹는 말, 밭을 가르는 밭담, 무덤을 두른 산담, 야자나무 군락지 등 걷는 동안 눈과 귀에 담은 아름다움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름에 소나무 ‘송’ 자가 붙은 만큼,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제주만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집약된 송악산
곰솔나무 빼곡하게 자란 송악산의 솔숲을 온전히 누리려면 안내도에 표기된 도착점을 시작점으로 잡는 게 좋다. 출발점에 비해 한산해서다. 시작부터 감미롭다. 숲을 감도는 상쾌한 솔향이 해풍과 섞여 날아든다. 바람 소리 거세질 때면 한 번이라도 더 솔 내음 깊숙이 들이켜기 위해 킁킁댄다. 솔잎 내려앉은 길은 더없이 폭신하다. 소나무 빼곡한 하늘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누웠는데, 당장 잠이 들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아늑하고 포근하다. 따뜻한 햇살이 드는 숲속에선 말 한 마리가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길 어귀에 드문드문 보이는 배설물의 주인이리라.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밤, 이 길의 주인은 말이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길의 주인은 말이다
솔잎 수북이 내려앉은 길은 폭신하다
솔숲을 지나 정비된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내리막길, 그 끝에는 바다와 초지, 가파도와 마라도가 한눈에 드는 비경이 펼쳐진다. 다시 오르락내리락 둘레길이 이어지고 세 곳의 전망대를 지나면 관광객으로 북적이기 시작한다. 출발점에서 탐방을 시작한 단체 관광객 대부분은 형제섬이 보이는 지점이나 부남코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 나간다. 북새통을 피해 능선을 따라 오르는 오솔길로 향했다. 솔잎길 표지판을 따라 오르면 된다. 이 길을 송악산의 백미라 말하고 싶다. 분화구의 능선, 목장, 산담과 밭담, 바다와 가파도가 상하로 겹겹이 자리한 풍경은 몽환적이다. 사계절의 각기 다른 풍경이 참을 수 없이 궁금해질 정도다. 길이 좁고 바람 소리가 거세다. 함께 걷는 두 사람은 길 위의 감동을 공유하기 위해 딱 붙어 귀엣말하게 되는 로맨틱한 길이다.
햇살은 솔숲을 따뜻하게 데우고, 바람은 청량한 솔 내음을 실어 나른다
도착점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선녀들의 난대림
천제연 폭포
이름이 비슷하면 헷갈리게 마련이다. 천제연 폭포와 천지연 폭포가 그렇다. 천제연 폭포는 중문에 있고 천지연 폭포는 제주시 천지동에 있다. 두 곳 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됐고 울창한 난대림이 있으며 무태장어가 서식하는 것도 비슷하다.
중문 단지의 천제연 폭포로 향했다. 천제연 폭포는 입장료를 받는 이름난 관광지다. 유명한 곳을 한적하게 즐기려면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한다. 난대림의 고요함을 만끽하기 위해 문을 여는 오전 여덟 시에 맞춰 달려갔다. 관광객이 몰리지 않는 시간, 숲은 새들의 차지다.
적요한 풍경이 압권인 천제연 제1폭포. 장마철이 아닌 때는 폭포가 흐르지 않는다
천제연 제2폭포는 천제연 세 개의 폭포 중 가장 장쾌하게 흘러내린다
탐방로를 걷는 내내 새들이 지저귀는 아름다운 하모니에 귀가 즐겁다. 새소리를 흉내 냈다. 나뭇가지에 살포시 앉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새의 표정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폭포에 닿는다. 폭포 주변은 사시사철 푸르름을 자랑하는 난대림 지대다. 솔잎란과 담팔수 등 희귀 식물들이 자란다. 천제연 폭포는 상·중·하의 3단 폭포로 이어져 있는데 제1폭포는 길이 22m, 수심 21m의 소(沼)를 이룬다. 제1폭포는 장마철이 아닌 때는 폭포가 흐르지 않지만, 기암절벽이 청록빛 물에 비쳐 일렁이는 적요한 풍경이 압권이다. 제1폭포의 물이 흘러내려 가 제2·제3의 폭포를 만드는데 물줄기가 장쾌하다. 옛 제주 사람들은 난대림 울창한 숲속 폭포를 두고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는 곳이라고 믿었다. 그 덕에 폭포 주변 시설들은 선녀로 가득하다. 선녀가 조각된 선임교에 오르면 폭포와 주변 난대림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선임교에서 내려다본 천제연 난대림의 풍경
물길을 향해 누워 자라는 담팔수
제멋대로의 아름다움
곶자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지내다 기쁠 때, 힘겨울 때 부둥켜안고 웃고, 울자.’ 곶자왈로 들어설 때마다 생각한다. 돌과 나무는 서로를 이렇게 다독이는 듯하다. 제멋대로, 아래로 박히고 위로 자라는 듯 보이지만 서로를 끈끈하게 안고 있는 관계. 사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면 곶자왈처럼 생기 가득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멋대로 자라나는 끈질긴 생명력이 곶자왈의 매력이다
곶자왈은 제주말로 수풀을 뜻하는 ‘곶’과 돌과 자갈이 모인 곳을 뜻하는 ‘자왈’의 합성어로 나무나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을 일컫는다. 농사지을 수 없어 버려진 덕에 지금은 자연 생태계가 고스란히 보존된 아름다운 땅이 됐다. 지표면의 미세한 기후 차이 때문에 국지적 기상 상태의 차이를 미기후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곶자왈에는 다양한 생물군이 자란다.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신기한 기온의 변화도 미기후덕이다.
곶자왈이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듯하다
햇살이 숲을 어루만진다
제주에서 곶자왈이 광범위하게 분포한 지역은 한경~안덕, 애월, 조천~함덕, 구좌~성산 총 네 곳이다. 이 중 한경~안덕 구간의 일부를 도립공원으로 지정한 제주 곶자왈 도립공원을 찾았다. 총 8km의 탐방로를 특색에 따라 다섯 코스로 나눴다. 테우리길은 온대림과 난대림이 뒤섞여 늘 푸르고, 빌레길은 평평한 용암판(빌레)을 징검다리 건너듯 걸을 수 있어 유쾌하다. 한수기길은 장마철 협곡에 물이 차는 탓에 탐방로를 가지런히 정비해 발아래 빽빽한 곶자왈을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다. 용암협곡이 이어지는 오찬이길과 원형 그대로의 곶자왈인 가시낭길은 다소 험준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닥만 보고 걸으면 빽빽한 숲의 아름다움을 놓치기 쉬우니, 쉬엄쉬엄 걷는 게 좋다.
숲이 말한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걷다가 중요한 것 놓치지 말라고. 숲이 가르쳐 준다. 주변 돌아보며 천천히 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