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07
그리움을 그리다
스케치북을 챙겨 오래된 장소를 찾았다. 긴긴 이야기를 간직한 그곳을 후루룩 지나치는 건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에디터 박은경 글, 그림 엄시연(‘스케치북 들고 떠나는 시간여행’ 작가) 자료제공 팜파스
since 1927
서울 마포 성우이용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인 성우이용원의 역사는 19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에게 이발 기술을 배운 할아버지 서재덕 씨가 처음 가게를 열어 사위 이성수 씨(1915~1984)에게 기술을 전수했고, 지금은 그의 아들 이남열 씨(67)가 이어 3대에 걸쳐 운영되고 있다. 이름조차 없던 이발소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중간 이름 ‘성’ 자와 우리의 ‘우’ 자를 따와 지금의 ‘성우이용원’이라 이름 붙였다. 건물은 1959년에 강타한 사라호 태풍으로 초가지붕에서 슬레이트로 교체된 것 말고는 세워졌을 당시 모습 그대로다.
회색빛 도는 빛바랜 건물이 살짝 기울어진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서 있다. 바람에 조금만 힘이 실려도 금방 부서질 것 같은 얇은 창틀과 닳고 닳은 문 위에는 유화물감을 툭툭 칠해놓은 듯 오랜 세월이 겹겹이 발라진 페인트 자국이 남아 있다. 다른 글자와 크기가 다른 ‘우’ 글씨가 재밌다. 몇 년 전에 떨어져 나가 이발사가 스티로폼으로 깎아 붙여놓은 것이다.
3대째 성우이용원을 지키고 있는 이남열 씨. 그는 열여덟 살에 가게를 물려받았으나 일이 너무 하기 싫어 수차례 도망치기도 했다. 그 마음을 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15년. 그가 37살이 되던 해였다.
네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는 금이 가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바닥, 테이프로 고정시킨 이발용 의자 3개, 오래된 이발도구들, 파란색 날개의 선풍기까지 모두 낡고, 부서지고, 오래된 것들로 가득하다.
아담한 크기의 세면대 위에는 양동이와 식초, 치약 같은 용품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이발사는 더운물과 찬물을 섞어 알맞은 온도의 물로 여러 번 머리를 헹궈준다. 마지막 헹굼 물에 린스 역할을 하는 식초를 살짝 풀어주는 게 포인트다.
이발소 안은 싹둑싹둑 가위 소리로 채워진다. 손님은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말없이 그저 눈 감고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윗머리 자르는 기술이 이발에 생명이다. 한 번 잘 깎아놓으면 다음 머리를 자를 때까지 머리 다루기가 편해지기에 정성을 들이는 시간이 길다.
since 1925
경기 안산 대부도 동춘 서커스
1925년 시작된 동춘 서커스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커스로,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놀라운 사실은 동춘 서커스가 중국보다 더 전통이 길며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보다도 먼저 탄생했다는 것이다. 동춘 서커스는 명절이나 마을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늘 축제의 중심이 되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고, 오락거리도 없고 TV도 없던 시절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눴다. 그리고 2011년, 오랜 세월의 팔도 유랑을 멈추고 대부도 북쪽 끝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서커스 공연장 천막은 괴기스러우면서도 판타지 가득한 공간이다. 서커스를 보러 가자는 아이들에게 “이누마, 잡혀가고 싶으냐? 아이들 잡아가서 식초물을 먹이면서 곡예사 시키는 거 모르냐”며 괜히 겁을 주던 어른들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공연 시작 30분 전쯤부터 하나둘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열악한 공연장은 같은 줄 10칸 정도를 떨어져 앉은 관객이 다리를 떨면 그 진동이 그대로 전해질 정도다.
서커스는 몸이 익힌 기술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공연이다. 때문에 곡예사들은 보통 7~8살 때부터 트레이닝을 시작해 무대 위 엑스트라로 세워지기까지 3~5년의 숙련 시간을 거친다. 동춘에서 활동하는 곡예사는 40여 명으로 가장 어린 곡예사는 15살, 가장 나이 많은 곡예사는 35살이다.
요상한 분장으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곡예사. 아이들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끼야~” 소리치며 도망가던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비록 ‘태양의 서커스’만큼 화려한 오프닝과 극적인 무대미술은 없지만, 배우들이 목숨을 걸고 펼치는 화려한 곡예는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다.
“만일 동춘 서커스가 없어진다면 영화, 연극, 뮤지컬, 국악, 서커스, 무용. 여기서 서커스가 없어지는 거예요.”
박세환 단장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