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30
언제나 몇 번이라도, 전북 고창
‘계절을 가리지 않는’ 여행지가 있다. 어떤 계절에 찾아간대도 저마다 다른 매력으로 마음을 붙잡는 곳 말이다. 전북 고창이 바로 그런 곳 중의 하나다.
글, 사진 박경일(문화일보 여행전문기자)
봄부터 가을까지, 아니 겨울에도 고창을 찾을 이유는 분명하다.
봄날의 선운산 동백, 여름날의 도솔천 초록 그늘, 초가을의 꽃무릇과 늦가을의 불붙는 단풍….
고창이라면 대번에 떠오르는 곳이 선운사다. 선운사가 고창에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고창에 선운사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선운사가 드리운 그늘이 다른 곳들을 다 가린다. 압도적인 명성의 관광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그렇다. 선운사 그늘에 가려 숨겨진 다른 곳은 눈길을 받지 못한다. 고창에서 선운사 말고 ‘다른 곳’으로 가는 여정을 제안한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처 발견되지 않은 덕에 이런 곳들은 아직 고즈넉하고 호젓하다.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화장한 여인의 속눈썹 같은 꽃, 꽃무릇. 선운사의 꽃무릇 군락지가 유명하지만, 소요산 자락이나 연기저수지 일대에서도 꽃무릇을 만날 수 있다
전북 고창에 고갯길 ‘질마재’가 있다. 시인 서정주가 아름다운 시편으로 주워 담은 민담과 설화의 고갯길이다. 질마재가 넘어가는 건 소요산 자락이다. 동두천의 그 소요산이 아니라, 고창에 있는 소요산이다. 두 산 다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닌다’는 뜻의 ‘소요(逍遙)’를 이름으로 삼았다. 압도적인 명성의 선운사를 빼고 고창 땅을 둘러보는 여행의 방식이 바로 ‘소요’다.
소요산의 팔분 능선에는 절집 소요사가 있다. 아슬아슬한 벼랑의 바위 위에 올라앉은 자그마한 절집이다. 고창의 거찰 선운사에다 대면 규모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소요사는 멀다. 선운사에서 차로 3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지만, 다들 선운사로 몰려간 뒤의 빈 산에 절집이라 까마득하게 멀다. 너무 멀어 거기 있는 것조차 아는 이들이 드물다.
소요사. 선운사에 가린 작고 소박하고 한적한 절집이다
세상에서 한 발 뒤로 물러앉은 절집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적막과 침묵이다. 그 침묵의 한가운데 소요사의 노스님이 있다. 30년 넘게 묵언 수행 중인 스님이다. 말하지 않고 30년이라니…. 스님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다. 왜 침묵을 시작했을까. 스님이 승복 오른쪽 주머니를 뒤져 종이 뭉치와 펜을 꺼내 글을 썼다. “번잡한 세상에 말 보태지 않고 고요히 살고자 했다”는 답이다. 문득 스님이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 속에서 걸어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다홍치마 입고 남편을 기다리다 재가 된 신부(서정주의 시 ‘신부’)처럼 말이다.
소요사에서 30년이 넘게 묵언수행 중인 노스님과의 필담
소요사 매력의 팔 할 이상이 조망이다. 법당 툇마루에 앉으면 선운산과 장장산, 축령산, 불갑산, 그리고 멀리 내장산과 무등산의 능선이 첩첩이 겹쳐진다. 여기보다 더 훌륭한 게 소요산 정상이다. 산 아래서 절집 소요사까지 차가 닿고, 소요사에서 다시 산 정상까지 도보로 10분이면 넉넉하다. 이래뵈도 소요산은 선운산보다 100m 이상 높다. 그러니 조망으로는 고창에서 여기를 따를 곳이 없다. 정상에서는 바다가 내만으로 깊숙이 갯벌을 끌고 들어온 후포와 곰소, 그리고 바다 건너 병풍처럼 펼쳐진 내변산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고창 쪽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심원면 일대의 갯벌과 해안도로 경관은 제주를 연상케 할 정도로 이국적이다.
소요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고창 일대의 논과 갯벌. 저기 갯벌 너머가 부안이다
소요산과 소요사도 그렇지만, 고창 선운사의 명성에 밀려 그 면모를 100분의 1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곳이 바로 운곡습지다. 운곡습지는 우리나라에서 16번째 람사르습지다. 이곳은 자연이 저 스스로 습지가 된 게 아니라, 인근에 원전이 들어서면서 통째로 마을이 소개(疏開)되고 30년 묵은 논과 밭이 늪으로 천이(遷移)되었다.
사람들의 간섭이 사라진 경작지는 내륙산지형 저층습지, 쉽게 말해서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원시의 숲과 늪으로 깊어졌다. 이곳을 지난 2009년 고창의 환경직 공무원이 발견했고 인간의 간섭이 배제되면서 저 스스로 본성을 회복해가는 자연으로서의 가치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심심한 듯 느껴지지만, 습지를 조금만 걸어보면 자연의 생명들이 저마다 조화를 이루는 세상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알 수 있다. 습지는 온통 물기 머금은 초록의 세상이다. 이곳에서 만나는 자연의 느낌은 화려함보다는 싱싱한 생명력이다. 습지의 수면 위의 수생식물에서도, 손톱만 한 꽃을 피워 올린 야생화에서도, 늪지의 물을 빨아들이는 버드나무에서도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운곡슾지의 초록
운곡습지 쪽에서 본 운곡저수지. 인근에 영광원전이 들어서면서 운곡저수지가 생기고 마을이 비워진 자리에 운곡습지가 만들어졌다
고창에서 가을에 꼭 가봐야 할 곳 하나 더.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고창은 바다를 끼고 있다. 고창의 바다는 여느 바다와는 좀 다르다. 무겁고 진득하다. 연안이 대부분 갯벌이라 그렇다. 갯벌을 끼고 억새와 갈대가 피어나는 고창 바다는 경관으로만 보자면 가을이 제철이다. 선운사쯤에서 인천강 하구를 지나 22번 국도를 따라가면 좌치 나루터에서부터 바다를 만난다. 거기서부터 길은 하전갯벌과 만돌갯벌로 이어진다. 노랗게 익은 논, 그 뒤로 바다를 가둬 만든 양식장, 그리고 그 너머에 바다가 있다. 해가 설핏 기울 무렵 이 도로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억새와 코스모스, 그리고 누렇게 익어가는 논 너머의 바다로 떨어지는 황홀한 낙조를 만날 수 있다. 누군가 ‘가을의 길’을 뽑으라면 목록의 맨 앞에 올려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다.
고창의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22번 국도길. 가장 아름다운 가을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