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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호


2019.3,4vol.500

대한민국의 구석구석 청사초롱이 밝혀드립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발행되는 월간지 청사초롱은 한국관광산업의 현황과 여행정보 및 관광공사, 지자체, 업계등의 소식을 전합니다.
발행호 491 호

2018.04.06

4·3 사건, 70주년… 그 슬픈 기행에 관하여

4·3 사건, 70주년… 그 슬픈 기행에 관하여


에디터 박은경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사진 우현석, 제주관광공사


“섬에는 우수가 있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마음을 갑갑하게 만드는 이유다. 오늘날 제주에는 달콤함과 떫음,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다. 초록과 검정, 섬의 우수, 우리는 동쪽 끝 성산일출봉 ‘새벽 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바위는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한 검은 절벽이다. 한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첫 해돋이의 미술적인 광경의 축제에 참석하러 오는 곳이 바로 여기다. 1948년 9월 25일(음력)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하여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의 눈 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곳이 여기 일출봉 앞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1948년 4월 3일에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인구의 10분의 1)을 자행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매일 아침 휴가를 맞은 여행객들은 기족들과 함께 바위 너머로 솟는 일출을 보러 이 바위를 오른다.”

- GEO 2009년 3월호에 게재된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끌레지오의 ‘제주기행’ 중에서




500명의 좌익 무장대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4·3 사건은 1947년에 열린 제28주년 3·1절 기념 대회에서 경찰과 주민의 충돌로 촉발돼 이듬해인 48년 4월 3일 무장대가 제주도 내 경찰서 등을 습격하면서 본격화됐다. 이를 공산 세력의 준동으로 규정한 미군정이 서북청년단, 군경을 앞세워 토벌에 나섰다. 이후 1954년 한라산이 금족 구역에서 해제될 때까지 이어진 학살로 희생된 제주 도민의 수는 3만명. 제주 도민의 가슴속에 4·3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진행형이다.


‘사태’로 불리던 ‘광주’가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된 것과는 달리 4·3은 아직 제대로 된 명칭조차 없고,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 역시 완성되지 않았다. 그런 4·3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70주년이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4·3의 해결’을 지난 대선에서 100대 공약 중 하나로 포함시켰던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의 주인이 됐기 때문이다. 제주 도민들이 4·3 해결을 기대하는 이유다. 그래서 이달에는 천착으로 4·3의 아픔을 지워내고 있는 전문가, 오승국 4·3평화재단기념사업팀장과 윤영국 전 제주관광대 교수를 만나보았다.


4·3평화기념관 내부 전시실1

4·3평화공원관 내부 전시실2



올해가 4·3 70주년이다. 4·3은 금기어였다. 2000년 1월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됐다. 이후 제주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오승국 팀장(이하 오 팀장) : 4·3 희생자 중 90%가 국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됐다.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27만 제주 인구 중 2만5000~3만명이 죽었다. 공권력에 의한 주민 학살은 세계사적으로 드문 일임에도 묻혀 있었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희생자 수가 많았다. 하지만 이승만에서 노태우까지 반공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는 시절에는 입에 올릴 수도 없었다. 나는 ‘4·3을 해결하지 않고는 제주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다. 20세기가 저질렀던 야만을 21세기에는 해결하자는 얘기다. 1999년 12월 17일 여야 합의로 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에는 진상조사 보고서가 확정됐다. 2003년 12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 국가의 잘못에 대해 현 대통령이 사과한 것이다.


윤영국 교수(이하 윤 교수) : 2000년 이후 제주는 굴레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당사자인 제주 도민들은 4·3에 대해 이야기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나마 육지 태생인 만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편이다. 4·3은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야 양지로 나왔다. 하지만 4·3에 대한 도민들의 생각은 여전히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구도로 생각하는 이도 있지만 제주도 입장에서 보면 도민 모두가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를 들으면서 많은 유족이 울었다. 어느 정도는 응어리가 풀렸을 것이다. 이후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평가를 뒤집지는 않았지만 4·3은 방치된 느낌이었다. 그것은 4·3 인식에 대한 후퇴였다. 후속 조치들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법 이후 10년 진보 정권과 9년 보수 정권이 이어지는 동안 진전이 없었다는 얘기인가.


오 팀장 : 20년간 변화가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다. 4·3평화공원 조성까지 국비로 진행됐다. 이후 9년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다행인 것은 2014년 박근혜 정권 때 4·3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는 것이다.


윤 교수 : 4·3평화공원은 노무현 정권 때 완공됐지만 잊혀진 관광지였다. 나는 제주를 찾는 여행객들이 있으면 어김없이 이곳에 데려온다. 그런데 여행객들이 ‘이곳은 제외해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짓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본격 운영된 탓인지 제주의 역사를 담은 관광지임에도 크게 조명받지는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로 유족들의 응어리는 풀렸다고 보나.


오 팀장 : 4·3 희생자의 유족들은 반세기 이상 제사도 숨어서 지냈다. 특별법 제정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보상과 배상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게 들어가면 법이 통과되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야 보상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특히 4·3 관련 수감자 4000명은 전국의 13개 형무소에 분산 수용됐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군경이 후퇴하면서 모두 처형한 것이다. 건국 이후 국가 체제가 정비되지 않은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국가가 개인을 그런 식으로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 희생자 유족 등 3000~4000명이 생존해 있다. 유족들도 연좌제에 시달렸다. 제주 도민은 4·3 문제 해결을 공약으로 내건 사람에게 투표해 왔다. 4·3은 제주도가 안고 있는 블랙홀이나 다름없다. 그 어마어마한 문제가 어떻게 말끔히 씻겨질 수 있겠나.


윤 교수 : 4·3은 분단이 가져온 비극이다. 내 생각에 종점은 아직 멀었다. 역사적으로야 한라산 금족령이 풀린 날, 마지막 무장대가 잡힌 날을 4·3의 마무리로 볼 수도 있겠지만, 피해자 명예 회복 없이는 문제의 해결을 이야기할 수 없다. 내가 제주에 처음 왔던 25년 전만 해도 길거리에 할아버지들이 없었다. 제주의 3다(多) 중에 하나로 여자를 꼽는 것은 4·3 때 남자들의 희생이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여자의 수가 많아 보였다는 얘기다.


오승국 4·3평화재단기념사업팀장

오승국 4·3평화재단기념사업팀장



이번에 취재할 곳으로 백조일손묘(百祖一孫墓)와 너븐숭이를 추천받았다. 이곳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오 팀장 : 제주시 북촌항 근처의 너븐숭이는 이(里) 단위로는 가장 희생이 컸던 곳이다. 1949년 1월 17일 무장한 산사람들이 매복해 있다가 트럭을 습격, 군인 2명이 죽었다. 바로 옆 함덕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보복에 나서 북촌을 초토화하고 학교 운동장으로 주민들을 집합시킨 후 20명 단위로 차례로 죽여 마을 주민 1200명 중 350명이 희생된 곳이다.


윤 교수 : 백조일손은 6·25 이후의 사건이다. 보도연맹 사건의 연장선에 있다. 해방 전후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후 한국전이 일어나자 모두 학살한 사건이다. 지서에 명령을 내려 조사를 받은 적이 있거나, 노동운동을 한 적이 있는 지식인은 경찰서별로 잡아 들이라고 한 후 예비 검속된 이들을 처형했다. 처형 후 유족이 시신도 찾아가지 못하게 하다가 5년만에 수습을 허락했다. 시신을 거두러 가보니 유골만 남아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100여 개의 칠성판에 시신을 수습해 한곳에 장사를 지냈다. 조상은 100명이지만 자손들은 한 형제들처럼 지내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4·3평화기념관이 보이는 4·3평화공원 풍경



4·3 사건과 관련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오 팀장 : 광주민주화운동처럼 제대로 된 명칭을 찾는 것과 보상 문제다. 5·18은 ‘광주민주항쟁’이라는 이름이 있고, 국가기념일이 됐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이름도 없다. 희생의 의미를 담은 이름을 정부로부터 받아 내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때 수감됐던 분 중 몇 명 생존해 있는데 이들의 명예 회복과 미군정의 책임 규명이 수반돼야 한다. 이 과제들이 해결됐을 때 한으로 쌓인 제주도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윤 교수 : 제주 도민들은 4·3이 깨끗하게 끝났다고 생각지 않는다. 제주에는 1년에 5000명이 태어나고, 10만명이 이사 오고 8만5000명이 섬 밖으로 나간다. 섬의 인적 구성이 달라지고 있다. 나처럼 제3자이면서도 이 문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관심한 이도 있다. 게다가 이제 가해자는 다 죽고 없어져 버렸지만 사죄해야 할 당사자들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본에만 사죄를 요구할 게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도 용서를 구할 일이 있다면 사죄해야 한다.



인터뷰를 마무리한 후 제주로 이주한 지 25년이 됐다는 윤 교수에게 한두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는 제주관광대학에서 관광을 가르쳤던 교수인 만큼 평소 제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을 풀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윤영국 전 제주관광대 교수

윤영국 전 제주관광대 교수



우리는 4·3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다. 4·3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제주에 와서 즐기다 간다. 하지만 알게 된 후에는 제주를 대하기가 조심스럽더라. 이 같은 심리가 온전히 4·3 때문인가.


윤 교수 : 그것이 4·3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부터 제주는 육지로부터 끊임없는 핍박과 가해를 받고 살아왔다. 고려 때 삼별초가 밀려들어 왔고, 3년 후에는 몽고군까지 들이닥쳤다. 최영 장군도 제주에 상륙해 백성을 동원해 성을 쌓게 하고, 수탈했다. 제주도의 모든 비극은 육지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야기된 셈이다. 이질감의 연원은 그렇게 오래된 것이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친절을 요구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육지 사람 입장에서는 일단 문화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개국 신화만 봐도 단군과 삼성혈이라는 다른 전설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육지 사람은 대부분 이 같은 배경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4·3에 대해 배운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20년 전만 해도 제주에는 섬 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90% 이상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1년에 10만명이 이사 오고, 제주 도민 중 8만5000명이 섬 밖으로 나간다.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리고 있다. 이주민을 중심으로 새로운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는 데다 이제 수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나는 그래서 이주민을 볼 때마다 “제주도의 주인이 돼라”고 말한다. 주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제주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이다.


4·3평화공원 내 세워져 있는 수많은 표석


4·3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제주에 온 이틀 동안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바람까지 세게 불어 유적지를 돌아보며 취재하는 동안 옷이 마를 겨를이 없었다. 하늘도 70주년을 기억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우리 국민은 별생각 없이 4월을 맞았고, 유채꽃 구경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도민에게 사과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기념일로 지정했듯이 4·3은 진영의 논리를 넘어섰다. 또 제주에는 600곳이나 되는 4·3유적지가 있다. 올 한 해만이라도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근처의 유적지를 찾아 4·3 사건의 실체를 살피고 인식을 새로이 했으면 한다.





약력


오승국

4·3평화재단기념사업팀장

4·3연구소 이사

제주올레 자문위원, 시인


윤영국

전 제주관광대 교수

제주 전문 가이드

제주대 관광학 석사

충북대 사회학과 졸업

4·3역사문화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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