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11
홀로 서는 가수, 김종진
홀로 서는 가수 김종진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칼럼니스트)
원래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았다. 그런데 한동안 여행기자를 하다 보니 방랑벽이 생겨났다. 음악도 팝송을 주로 들었는데, 방랑벽 덕분인지 소리에 대한 편력도 일정치 않게 됐다. 요즘은 클래식도 듣고, 샹송도 듣고, 가요도 듣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제대로 아는 건 없다. 그래도 그 주제에 이따금 생음악으로 듣고 싶은 가수도 있다. 젊었을 때는 김광석과 송창식 콘서트가 열리면 찾아가 듣는 편이었고, 나이가 들어선 신효범도 듣고, 봄여름가을겨울도 들었다. 연주자들 중에서는 기타리스트 박주원의 CD를 여러 장 가지고 있는데 라이브로 들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은 대부분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그나마 봄여름가을겨울이 활동을 하는 편이었는데, 작년부터는 움직임이 활발치 않았다. 멤버 중 한 명인 전태관이 몸이 편치 않아 음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홀로 남은 김종진의 행로가 궁금해 그를 찾아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았다.
요즘은 혼자 활동하시나요?
알려진 것처럼 태관이가 암으로 투병 중입니다. 태관이는 치료를 위해서 지난해 말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탈퇴했어요.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서로 잘 맞았지만 아쉽게 됐어요. 친구가 아픈 와중에 나 혼자 활동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저도 작년 말까지는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올해부터는 다시 시작해야지요.
김종진과 전태관이 함께 음악을 한 지는 30년이 넘었다. 이들을 처음 취재한 게 2008년이었는데 첫 인상이 진중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친구가 아픈데 나 혼자 음악을 할 수는 없다’는 아티스트의 말에 사내들 간의 의리가 느껴졌다.
태관 씨와 음악을 시작한 게 82년이고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한 것은 88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로는 86년부터 활동했었죠?
86년에 봄여름가을겨울이 활동을 시작했어요. 올해가 30년 되는 해거든요. 제일 처음 (김)현식이 형이 떠나가고, 우리끼리 활동을 시작한 게 88년이에요. 그래서 앞으로 2년간이 우리에게는 의미 있는 기간이지요. 그 동안 다른 멤버는 영입하지 않고, 태관이와 내가 중심이 돼서 세션을 기용하는 형식으로 음악을 해왔어요. 저는 같이 활동한 멤버끼리 오래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세션 중 베이스는 96년부터, 기타는 2002년부터 같이 활동해 온 친구들이거든요. 제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엘튼 존 공연을 본 적이 있어요. 엘튼 존이 연주를 하는데 함께 하는 세션들이 모두 할아버지들이었어요. 감동적이더라구요. 젊은 애들 손가락 놀림이 빠르기는 하겠지만, 경험이 많은 사람들끼리 무대 위에서 공유하는 정서는 따라갈 수가 없어요. 우리 음악의 지향점이 완벽한 연주에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박현진
태관 씨를 처음 만난 건 훨씬 전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아마추어 밴드로 82년부터 태관이를 만나서 그룹 이름도 없이 활동했어요. 전태관 씨가 서강대 학생그룹 킨젝스 리더를 하고 있었고, 저는 군복무 중 낙도 위문을 다니는 해군홍보단으로 있을 때 처음 만났어요. 내가 제대하고 태관이가 졸업한 해가 86년이었는데 마침 타이밍이 잘 맞은 거지요. 그때 고(故) 김현식 씨가 우리를 불렀어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멤버가 4명이었는데, ‘비처럼 음악처럼’ 음반을 발표하고 현식이 형이 돌아가셔서 활동이 뜸해지자 멤버 두 명이 ‘사랑과 평화’로 갔고, 우리 둘만 남게 됐어요.
활동을 안 하는 동안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서울재즈아카데미 부원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가르친 지는 4년 됐어요. 강의는 공개 강의를 하나 하고 있고, 특화돼 있는 과목으로는 펑크앙상블 강의를 하고 있어요. 펑크 음악은 첫 글자가 F면 흑인이 하는 장르고, P를 쓰면 백인이 하는 음악이에요. 펑크는 밴드로 하는 음악이니까 앙상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앙상블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악보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그런 영향을 받아서 나온 거에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부를 때마다 달리 구사하는 그의 주법이 떠올랐다. ‘악보대로만 부를 줄 알아도 소원이 없겠다’는 내 수준에서는 공유할 수 없는 경지라는 생각을 늘상 해오곤 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올해로 만 30년이 됐다고 했는데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태관 씨나 세션들과 부딪히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음악을 하면 견해차이나 해석에 따라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음악 하는 사람들은 아티스트라서 예민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다행히 태관이 하고 저는 음악적인 면에서는 찰떡궁합처럼 잘 맞았어요. 듣는 음악도 비슷하고, 추구하는 장르도 비슷했어요. 충돌할 때보다는 서로 의지할 때가 더 많았지요.
봄여름가을겨울의 초기 음악은 팬들 사이에서 퓨전 재즈(Fusion Jazz)로 알려져 있습니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첫 음반을 냈을 때 수록된 곡이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전형적인 퓨전 재즈였죠. 그 다음부터 다양한 장르를 실험했어요. 록, 펑크, 라틴 등 여러 장르를 섭렵했어요. 지금까지 30년간 활동하면서 ‘우리 음악은 어떤 색깔일까?’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어떤 장르에도 속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요. 팬들이 라디오에서 우리 노래를 들었을 때 ‘이건 봄여름가을겨울 스타일의 음악이구나!’라고 평가해주시면 그게 가장 큰 영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이신화
그래도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내가 걷는 길’ 같은 발라드 곡이 히트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하시겠습니까?
발라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에요. 봄여름가을겨울 음악 안에는 발라드도 있고, 펑크도 있고, 라틴, 락도 있고, 모든 요소들이 녹아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가 잔잔한 곡들만 노래했다면 대중들의 평가는 지금하고 많이 다를 거예요. 하지만 공연 때 새로운 연주법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왔어요.
지금 태관 씨가 그만 둔 상황에서 활동은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올해부터는 다시 활동을 시작할 테지만 세션들 하고 같이 할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단계가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복 받은 사람은 한 가지 색깔로만 활동을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배우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걸 알아가는 단계에요. ‘어쩌면 밴드 음악이 아닌 나 혼자만의 음악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가 30년을 같이 했는데 태관이는 법인으로 운영되는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손을 뗐어요. 처음에 현식이 형이 떠나더니, 유재하가 떠나고, 태관이도 떠났어요. 밴드음악이라는 게 앙상블 스피릿(Spirit)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나의 숙명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당대에 필요한 정신이지요. 요즘 음악이 너무 개인주의로 흐르고 있거든요. 요즘 젊은 아티스트들 중에는 정서를 공유하는 방법을 모르는 친구들도 있어요. 그래서 나만은 제대로 된 앙상블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요. 하지만 우선은 홀로 서서 김종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2018년쯤 돼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을 하게 될 것 같아요. 나름대로 그런 계획을 세웠는데 실현될 지는 모르겠어요.
뮤지컬 ‘금발이 너무해’에 출연도 하셨지요? 장유정 감독 말로는 ‘김종진 씨가 대스타임에도 워낙 진지하게 몰입해 깜짝 놀랐다’고 하던데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엄청 힘들기도 했고요.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으니까요. 이 나이에 암벽등반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서 모르는 걸 배워 나갈 때 희열을 느껴요. 뮤지컬이 바로 그런 경험이었어요. 뮤지컬 배우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정말 치열하게 살더라고요. 그때 더블 캐스팅으로 하루에 두 번씩 공연을 했는데, 1회 공연은 어떻게 하는지 보러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마침 그날은 한 차례만 공연이 있는 날이어서 헛탕을 쳤어요. 5시간이나 일찍 간 셈이 됐는데, 무대 위에 여배우들이 요가복을 입고 몸을 풀고 있더라고요. 남자 배우들은 발성 연습을 하면서 동선을 따라 스텝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정말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아내(그의 아내는 탤런트 이승신 씨다.)를 더 잘 이해하게 됐어요. 연기자들이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무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또 같은 지구에 살고 있지만 인도네시아 사람과 브라질 사람이 언어가 다르듯 음악과 연기는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더 잘 보입니다.
8집 ‘아름답다 아름다워’, 9집 ‘브라보 마이 라이프’, 10집 ‘2012 와인콘서트 실황음반’, 11집 ‘봄여름가을겨울외전’이었죠? 앞으로도 음반은 꾸준히 내셔야겠죠?
정규 앨범은 8집 ‘아름답다 아름다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올해 목표는 음반을 내는 겁니다. 지금까지 매년 냈으니까 거르면 안 되지요. 요즘은 예전처럼 CD가 많이 팔리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여지껏 우리는 공연을 하든, 음반을 만들든 항상 제작비를 많이 써왔어요.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면 배우고 싶어요. 손해를 보면서도 CD를 계속 내는 이유는 판매량은 줄어도, 새 음반이 나올 때마다 다운로드 발생에 따른 매출과 수입이 늘어나기 때문이죠. 더 큰 딜레마는 공연이에요. 제작비가 안 나오거든요. 그래도 공연을 하는 이유는 아티스트는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해야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의사라면 돈을 못 벌어도 진료를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요.
ⓒ이신화
공연 얘기가 나왔으니 물어 봅시다. 최근 공연은 2014년 11월 올댓재즈, 2015년 KT&G 상상아트홀 공연으로 기억됩니다. 공연도 꾸준히 해나가야죠?
1년에 한 번씩 봄에 발표회 형식으로 해왔어요. 작년에는 라디오DJ쇼처럼 구성했었죠. 한남동 삼성블루스퀘어에서 했는데 봄에 하는 공연이라서 이름을 ‘청춘’이라고 붙였어요. 그리고 정기적으로 했던 와인콘서트는 11월 말에 해왔지요. 우리들이 자주 가는 와인바를 빌려서 공연을 하고, 관객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취한 상태로 올라가서 연주를 했어요. 평소에는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연주를 하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해마다 찾는 골수팬 여러분들과는 감정의 벽을 허물고 싶은 거지요. 거기 오셨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W호텔에서 한 적도 있고, 2011년 청담동 ‘미엘’에서 했을 때는 장소가 좁아서 50명밖에 모시지 못했어요. 그땐 표를 구하느라고 난리가 났었죠.
와인콘서트는 몇 년간 해오셨나요?
9년간 이어 왔어요. 와인콘서트는 10년짜리 프로젝트였는데 태관이가 아파서 작년에 하지 못했기 때문에 10년은 채우지 못했어요. 와인콘서트는 라이브뮤직의 정수를 실현해 보려는 우리의 열정이에요. 자신을 치장하고 싶어서 화려한 세트와 특수효과에 맛을 들이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 힘들 거든요. 우리는 그런 초심을 지켜나가고 싶었어요. 가식을 다 벗어 던지고 ‘우리는 이런 놈들’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와인콘서트를 하면 무조건 녹음해서 1년 후에 음반을 냈어요. 와인이 숙성되는 것과 비슷한 절차를 거친 거지요. 1년 전에 녹음한 소리를 9개월간 듣지 않고 놓아두었다가, 3개월간 믹스하고 작업을 해서 내놓는 일을 되풀이 했어요. 1년 전의 음악을 들으면 세월 가는 게 느껴지고 과거를 반추하게 되거든요. ‘올댓재즈’에서 와인콘서트를 했을 때는 청중을 100명밖에 받을 수 없었어요. 입장료를 1인당 10만원씩 받는다고 해도 1000만원 밖에 안 되잖아요. 대차대조표는 늘 마이너스였어요. 영상을 찍는데만 3000만~4000만원이 필요하니까요. 경제적으로만 보면 미친 짓을 한 거지요.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가까이서 팬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라 외국 스타 중에서도 노라 존스 같은 이들은 성공한 후에도 작은 클럽에서 공연도 하고, 발표도 합니다.
그를 인터뷰하기 전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해 보았더니 한국관광공사에서 공로패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한국관광공사 공로패는 어떤 일로 받으신 겁니까?
봄여름가을겨울이 인천시 홍보대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관광공사가 외국 사람들을 불러들이려고 애를 썼어요. 일본 팬들을 유치하기 위해 가나자와와 도쿄에서 행사도 하고, 공연도 했어요. 그 공로로 상을 받은 거지요. 그 동안 우리만의 콘서트를 하기 위해서 간 적은 있지만 그런 행사에는 잘 안 갔거든요. 그래서 상을 준 것 같아요. 일본 사람들이 대체로 블루스를 좋아하는데, 우리 음악이 블루스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그런지 반응이 좋았어요.
작년 성탄절 직전 유준상 씨가 힐링캠프 출연했을 때 깜짝 출연한 적이 있지요? 유준상 씨가 김종진 씨 팬이라고 밝히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걸 봤습니다. 평소에 친분이 있었나요?
집사람을 통해서 알고 있었어요. 분당 살 때 유준상 씨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지하에 자기 스튜디오를 해놓고 음악에 미쳐 살더군요. 음악에 대한 사랑이 끝이 없는 친구더라고요. 내 음악을 좋아한대요. 68~72년생들이 대학 다닐 때쯤 ‘봄여름가을겨울’의 1,2,3집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 때 유준상 씨가 힘든 시간이었나 봐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였고, 그랬으니 기억에 남았겠지요. 그럴 때 우리 음악을 듣고 위안을 받았나봐요.
ⓒ우현석
다른 이들의 감수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확인할 때 느끼는 보람이 남다르겠습니다.
오늘 음각감상법 수업이 있었는데 엘리어트 스미스(Elliott Smith)의 음악을 들었어요.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음악가인데 10년 전에 죽었어요. 한 학생이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안 듣고 지금에야 듣는다’면서 ‘스미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울었다’고 하더군요. 내가 보기에는 울만한 음악은 아니었는데…. 한편으로는 ‘나도 옛날 같으면 울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나이 또래의 남자들은 나를 보면 안 놓아주려고 해요.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에 내 음악을 들었다는 얘기지요. 남자들은 감수성이 최고조일 때부터 20년쯤 지나면 감성이 정리되는 것 같아요. 그 때 부터는 새로운 심미안이 생기지요.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겨나요. 올해부터 3년간은 새로운 귀가 열린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감성을 불사를 수 있는, 공감이 가는 음악을 해야겠다는 게 내 계획이에요.
소통이 사라져 버린 시대에 그는 이해와 존중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보다는 대중과 공감하는 음악을 얘기하는 겁니까.
그렇죠. 처음에는 내가 만족하려고 했는데, 요즘에는 듣는 이들 좋으라고 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잘못된 게 아니에요. 한때는 내가 좋아하는 게 최고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하느님이 저를 그렇게 쓰고 계시는 것 같아요. 철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는데 아티스트들이 도를 지나쳐서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에요. 한때는 나도 그랬으니까요.
인터뷰를 마치자 주위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몰려와 사인을 부탁했다. 그는 사인을 해주고 사진까지 함께 찍었다. 얘기가 잘 통하는 우리는 내려앉는 어둠속으로 나와 시장기를 채우러 밥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