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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스토리


발행호 472 호

2016.09.06

장흥을 지키는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

한승원 작가

장흥을 지키는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지엔씨21

소설가 한승원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한강을 광주에서 낳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고향인 장흥에서 살고 있다. 그는 광주, 서울 등 객지에서 살다가 90년대 말 낙향했다. 한강에게 광주가 그랬던 것처럼, 장흥은 한승원 문학의 시원(始原)인 셈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장흥에서 집필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바다는 생명과 같다. 우리 삶의 근원적인 생명체가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며 “나는 그런 바다를 ‘우주의 자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택인 해산토굴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유인 듯했다. 서울의 정 남쪽인 정남진과 천관산을 끼고 있는 장흥은 한승원을 비롯해 이청준, 송기숙 등 여러 문인을 배출해냈다. 장흥의 어떤 풍광과 토양이 그들에게 문학적 자양분을 공급했는지, 그리고 그 문학적 DNA는 어떻게 대를 건너뛰어 한강에게로 전해졌는지 궁금했다. 불원천리 전라남도 장흥의 해산토굴을 찾아 소설가 한승원의 얘기를 들어봤다.

한 선생님의 고향은 장흥입니까.

그렇지. 장흥군 회진면 신명리에서 태어났어요. 광주에서 10년, 서울에서 17년 살고 이곳으로 내려왔지. 장흥군이 고향이긴 하지만 신명리에는 연고가 있어서 온 건 아니고. 풍광이 좋아 찾아온 겁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따님인 작가 한강 씨가 장흥의 문학적 정서를 이어받아서 좋은 작품을 쓰게 됐다고 하던데 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강이는 광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에서 10년간 직장 생활을 했어요. 나는 나름대로 애들에게 고향을 심어 주려고 신경을 썼어요. 어머니가 동생과 함께 고향인 장흥군 섬마을에서 김 양식을 하며 살고 계셨는데 방학 때마다 그곳으로 애들을 내려보냈어요. 여름철에 한 번씩 다녀오면 모기에 물려서 고생을 많이 했지. 아마 우리 아이들은 가슴 속에 바다의 정서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장흥 천관산의 여름

장흥 천관산의 여름

장흥 편백숲우드랜드

장흥 편백숲우드랜드

아닌 게 아니라 한승원은 대한일보에 단편소설 ‘목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갯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목선’은 한승원이 그의 부친을 도와 김 양식을 하면서 챙긴 노동의 기억을 토대로 쓴 작품이다.

이상문학상, 김동리문학상을 한강 씨와 함께 2대에 걸쳐 수상했는데, 두 분의 성향이 상을 시상하는 기관의 지향점과 맞아 떨어진 것이라도 있습니까.

애비인 나의 영향을 받은 거야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어민이자 농민의 아들이고 그 아이들은 소설가의 자식이에요.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나는 어린 시절 책과 접하지 못했는데 애들은 책 속에서 자랐어요. 내가 받은 상을 그 애가 받았다고 해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저 상이란 건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는 표시일 뿐이지. 강이의 작품 안에는 새로운 시도, 감각, 세계가 들어 있어요. 요즘 신세대 작가들은 표피적이고, 감각적인데 비해 강이의 소설을 읽어보면 전통적인 분위기에, 뿌리를 깊이 내린 세계,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을 지향하고 있어요. 강이는 숨어서 글을 쓰는 스타일이었어요. 작품을 탈고해서 내게 봐달라고 한 적이 없으니까. 그 애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는데, 그것도 집사람이 대신 가져다 응모할 정도였죠.

부녀간의 문재(文才)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흥이 자랑하는 천관산 문학공원에 이름을 내걸고 있는 그 수많은 문인들의 재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한승원 선생이 설명할 책임은 없지만, 그래도 마주 앉은 김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장흥은 이청준, 송기숙 선생 등 걸출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럴 만한 특별한 환경이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장흥은 동학운동이 세를 떨쳤던 곳이에요. 장흥경찰청 법원 터는 조선시대 부사가 살던 곳이지요. 강진에는 군수가 유(留)했고, 이곳에는 관아가 있었어요. 옛날 교도소 자리에 문학관을 유치하려고 한다는데, 그 자리에는 벽사역이 있었어요. 파발마를 키우던 곳이지. 그곳은 종6품 벼슬이 관리하던 찰방역이었어요. 벽사역은 순천 등 아홉 개의 작은 역을 거느린 본부였던 셈이지. 그래서 장흥에는 부사가 살고, 찰방역장도 살았어요. 찰방역은 출장 온 벼슬아치에게 말을 빌려주는 임무만 한 게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국정원 지부 역할도 했거든. 종4품 부사 못지않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 부사는 장흥만 관할하지만 찰방은 사방의 관할 역사까지 영향력을 미쳤어. 그리고 회진에는 바다를 관할하는 만호가 있어서, 장흥에는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가 셋이나 됐지. 그러니 조선 말기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수탈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백성들의 저항이 강할 수밖에 없었지. 동학이 일어났을 때 이곳의 세력이 성했던 건 당연했지. 동학군들이 우금치까지 몰려갔다가 전투에서 패퇴한 후 이곳 장흥에 다시 집결해서 장흥부사를 죽이고, 강진까지 접수했어요. 그 후 관군과 일본군이 장흥을 공략해서 동학군을 정벌하고 뿌리를 뽑았던 거예요. 동학군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색출해 내 처단했던 까닭에 3·1운동 때에는 장터에서 만세 부를 이들이 없을 정도였어. 장흥은 그런 역사가 있는 곳이요. 게다가 6·25동란 때 이곳 산골짜기 일대는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빨치산이 집결해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졌어요.

군경과 빨치산이 수없이 죽어 나갔어. 장흥은 피맺힌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에요. 장흥을 문향으로 만든 또 다른 요소는 자연환경이야. 앞에 바다가 있고 시내 중심에 탐진강이 흐르는 데다 천관산, 억불산, 제암산 등이 버티고 있어요. 안팎으로 물이 있고 산이 있거든. 자연환경 속에서 문학이 자랄 수 있는 풍토가 갖춰진 셈이지요. 송기석, 이승우, 이청준 등 유명한 작가들이 배출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지.

장흥 소등섬

장흥 남포마을 소등섬 일출

장흥 소등섬

한강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후 작가가 된 집안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가 책 정리를 안 했다. 집에는 어디건 책들이 널려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락이었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자녀들이 모두 작가인데 가족이 모이면 서로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합니까.

우리 집엔 그런 일이 없소. 상대방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우리 애들이 어려서 내 작품을 읽었을지는 모르나 요새는 안 읽는 것 같아. 작가에게 치명적인 것이 있다면 ‘누구를 닮았다’는 평가인데 걔들이 내 책을 읽겠어요? 나도 걔들 글을 읽고 평가를 해 본 적이 없어. 내가 아이들의 작품을 평가한다는 것은 내 세계로 끌어들인다는 얘기인데…. 그건 안 될 말이지. 이미 애들은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세계를 가지고 있어요. 팔불출이라고 욕먹어도 어쩔 수 없지만 ‘나도 애들처럼 이렇게 섬세하게 써야겠구나’ 하고 오히려 배운다니까.

한강이라는 이름은 선생님께서 지어 준 이름입니까.

그렇지. 강이 본명이에요. 내가 애들 이름을 크게 지었어. 쉽고 잊히지 않는 이름이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해서 지은 거야. 강이가 샘터 다닐 때 서울신문 신춘문예 응모하면서 한강현이라는 필명으로 접수시켰어. 그리고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안 쓰고 필명을 써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내가 ‘괜찮다’고 그랬지. 그때 샘터 편집장이었던 김형영 시인이 우리 애에게 ‘한강이라는 좋은 이름 놔두고 촌스럽게 한강현이라는 이름을 썼냐?’고 그랬대. 그 말을 듣고 내가 ‘한번 이름을 쓰기 시작하면 못 바꾼다. 앞으로는 청탁이 오면 한강이라고 쓰라’고 했어. 그다음부터는 본명을 쓰더라고.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한강이 필명인 줄 아는 이들도 있어요.

한승원 장편소설 - 추사 책표지

‘추사’, ‘다산’ 등 역사 속의 인물들을 다룬 작품이나 ‘아제아제바라아제’ 등 종교소설도 여러 편을 쓰셨습니다.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은데 글감 취재는 어떻게 하십니까.

공부죠. 내가 서울에서 살다 내려와서 이곳에서 20년째요. 여기 내려올 때 역사소설 쓰겠다고 작정을 하고 내려왔어. ‘초의’, ‘추사’, ‘다산’, ‘원효’를 모두 여기서 썼어. ‘석가모니’까지 쓰고는 역사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으려고 했지. 모두 서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야. 여기 내려와서 공부 많이 했어. 다산, 초의, 정약전, 원효는 공부를 웬만큼 해 가지고는 쓸 수 없는 사람들이야. 작품을 쓰기 전에 유학 경전은 물론이고, 불교 경전도 읽어야 하거든. ‘초의’를 집필하기 전에는 차(茶)를 공부하고, 불경, 유학, 탱화, 바라춤까지 공부했어. 초의는 조선조 후기에 스님을 멸시하던 때에 유학자들과 소통을 하던 사람이요. 벼슬아치들이 초의의 글씨와 그림을 얻고 싶어 할 정도로 뛰어난 학문을 이룬 분이지. 유학자들이 책을 내면 발문을 초의에게 부탁할 정도였어. 초의선사는 서른 살에 다산을 만나서 죽을 때까지 교류한 분이에요. 다산도 추사 못지않게 경전에 능한 사람이요. 추사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였지. 보통 천재가 아니라니까. 나는 ‘추사’를 쓸 때 ‘완당(추사의 다른 호)전집’을 다 읽고 난 후 작품을 썼어. ‘다산’, ‘원효’를 쓸 때도 관련 서적을 모두 읽었지. 원효는 다산 못지않게 저술을 많이 한 분이에요. 경주 남산 근처 원효가 살던 곳에 가서 답사를 하고, 책을 썼어. 난 장흥에 와서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장흥에 사는 분으로서 외지인들이 와서 꼭 보고 갔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까.

존재 위백규 고택과 사당은 보고 가라고 권해요. 문학은 비가시적이지만 천관산문학관이나 산책길 등은 가시적인 것이고, 이청준 생가와 무덤 자리도 가볼만한 곳이지. 요즘 지자체들이 문학사료관 등을 경쟁적으로 크게 만들려고 해요. 양평에는 황순원, 봉평에는 이효석문학관 등을 경쟁적으로 만드는데 외국에는 그런 곳이 없어. 그냥 살던 집을 그대로 박물관으로 쓰거나 그래요. 그래서 나는 내가 죽은 다음에 쓸데없이 그런 짓 하지 말고, 살던 곳에 그대로 자취를 남겨달라고 말을 하지.

문답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의 생가(生家)가 궁금했다.

선생님이 태어나신 생가는 그대로 있습니까.

태어난 곳은 복원하지 않고, 어려서 살던 집에는 조카가 손을 봐서 살고 있지.

온전히 보존되고 있나요.

뒤에 옹달샘은 그대로 있어요. 가끔 가서 마셔보기도 하지. 그 물을 마시면 시도 잘 써지고 그래.

선생님 댁에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나요.

관광객들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문을 잘 열어줘요. 한승원문학관은 강당으로 이용하고,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단체로 찾아오면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하기도 하지요.

어떤 주제로 강의하십니까.

문학적인 정서나 시인의 생각, 어떻게 살아가는 게 문학적인 삶인지, 문학은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해 강의하지요. 문학이 아닌 것은 현실적이고, 문학은 비현실적인 것인데 그걸 읽고 감동하는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 강의를 하기도 해요. 강의를 들으러 오는 학생 중에는 스티브 잡스 같은 발명가, 판검사, 교수가 될 인재들도 있을 텐데, 시나 소설을 읽고 자라면 너희들이 훨씬 더 유능한 사람이 될 거라고 얘기해 줘요.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다는 것은 자연 친화적인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니까.

이야기중인 한승원 작가

그의 말은 지당하다. 한승원이라는 문인의 말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같은 현실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출세했네, 감투 썼네 하는 인사들 중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인격을 갖춘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서 알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어 내친김에 한 발짝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최근 들어서 독서인구가 현저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고 어떤 얘기를 하고 싶습니까.

얼마 전 서울에 가서 지하철을 탔더니 모두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더구먼. 그런데 종이책이 팔리겠어요? 우리는 때만 되면 노벨문학상 타령을 하는데 웃기는 얘기야. 노벨상을 받고 싶고, 그런 작가를 배출하고 싶다면 책을 사줘야 해요. 작가에게 술을 한 잔 사주는 것보다 책을 사주는 게 도와주는 거요. 소비자인 독자 입장에서 봐도 만원 들여서 책 한 권 사면 며칠을 읽고 그 감동이 한동안 가지 않아요? 하지만 만원 가지고 외식할 수 있습니까? 최소한 돈 10만원 이상은 있어야 한 가족이 외식할 수 있잖아요. 책 한 권 사서 부부가 돌려 보면 생활이 향기로워질 텐데. 이제는 너무 표피적인 세상이 돼 버렸어.

작가들 중에는 소설이나 시 중에서 한 가지만 쓰는 이들도 있지만, 소설과 시를 함께 쓰는 부류도 있습니다. 한강 씨도 소설과 시를 함께 하던데, 선생님 영향을 받은 겁니까.

대체로 소설가들은 시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요. 나도 그랬고…. 나는 소설이 당선돼서 소설가로 먼저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지. 50살이 되던 해에 몸이 많이 아팠는데, 그해에는 체력이 뒷받침돼야 쓸 수 있는 소설 대신 시를 많이 써서 시집을 냈지.

김훈 선생의 선친인 김광주 선생은 소설가에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우리 문단에는 이처럼 대를 이어 작가가 된 집안이 적지 않습니다. 한 선생님 댁도 작가 집안인데 대물림에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감수성은 물려받는 부분도 있을 테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면 자연히 글 쓰는 재주를 갖게 되는 거지. 허재 감독 아들이 농구 잘하고, 차두리 선수가 축구 잘하는 거 봐. 소설가 집안에 소설가 나오는 건 당연한 거지. 게다가 우리 집은 아내가 큰 역할을 했어. 애들 엄마가 나를 공경하지 않고, 애들이 국문과 진학하는 것을 반대했다면 애들이 작가가 되지 못했을 거요. 우리는 애들에게 법대나 의대 같은 곳으로 진학하라고 권해 본 적이 없어. 집사람이 애들이 가겠다는 국문과로 보내더라고….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자기를 뛰어넘는 것보다 좋은 게 없어요. 김훈도, 한강도 승어부(勝於父:자식이 아비를 뛰어넘는 것) 한 경우지.

한승원 문학산책로1

한승원 문학산책로2

한승원 문학산책로

건강은 어떠세요.

며칠 전에 구토를 해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더니, 헬리코박터 치료약을 주더구먼. 약이 독해서 메스꺼워. 열흘을 먹어야 한다니 못 견딜 것 같아요. 먹지 않으려고 해.

운동은 좀 하십니까.

문학산책로를 아침에 한 바퀴씩 돌아요.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난다는 한 선생은 기자 일행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쉬웠는지 횟집 이름을 가르쳐 주면서 “내 이름 대고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의 마음만 받기로 했다. 기자는 그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하직 인사만 남기고는 서울로 향했다.


한승원 | 소설가, 시인

1939.10.13 전라남도 장흥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66 대한일보 ‘목선’ 등단

2012 제9회 순천문학상

2006 제9회 김동리문학상

1988 제12회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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