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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스토리


발행호 473 호

2016.10.07

다큐멘터리 감독 박종우

네셔널지오그래픽 잡지 더미에 누워있는 다큐멘터리 감독 박종우

 

다큐멘터리 감독 박종우

 

write 우현석(여행작가, 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photograph 박종우

 

 

 

“우리와는 차원이 달라요. 거장이지요”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을 제작한 박종우 감독이 사진전을 한다는 기사 옆에 게재된 임진강 사진을 보고 받은 충격에 대해 동료 기자에게 이야기를 하자 돌아온 대답이다. 여행 기자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임진강에 몇 번은 다녀왔을 터이고, 그곳 사진도 여러 컷 촬영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박종우 감독의 임진강 사진을 보고 나니 내가 찍은 사진들은 모두 버려야 할 판이다. ‘일말의 양심이 있고, 체면이 있는 만큼 낯 뜨거운 내 기록의 증거들은 인멸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과 저런 곡절 끝에 그를 인터뷰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박 감독은 다큐멘터리 제작하랴, 사진 촬영하랴, 프로젝트 수행하랴 공사가 다망해서 만나기가 몹시 힘들었다. 인터뷰를 약속한 날 역시 계획은 예정대로 이행되지 않아 온종일 그를 잡으러 다녔다. 오후 세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염두에 두고, 오후 한 시에 분당 사무실을 나서려는 순간 ‘모(某)대학 프로젝트로 회의가 있으니 다섯 시쯤 작업실로 오라’고 전화가 왔다. 시간이 남아 강남·북을 두 차례 왕복했는데도 그를 쉽게 잡을 수 없었다. 우왕좌왕 우여곡절 끝에 애초 약속 장소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왕십리의 한 찻집에서 그를 겨우 만났다. 숨을 돌리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는 사진작가에 다큐멘터리 PD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인터넷 카페를 만들기도 했고, 게스트하우스도 처음으로 운영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면 청사초롱에 꼭 맞는 인물 아닌가?

 

 

 

네이버를 검색해보니 온아시아 소속으로 돼 있던데 무슨 일을 하는 곳입니까.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온아시아는 타이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유럽 출신 다큐사진가들의 연합체입니다. 주로 인쇄매체에 사진을 공급했는데, 지금은 유야무야됐어요.

 

처음에 하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83년 말 한국일보 41기 사진기자로 입사했어요. 2년 근무하다 86년에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서 이곳저곳 구경하며 살고 있는데, 한국일보에서 연락이 왔어요. ‘88년 서울올림픽 때 일손이 모자라니 다시 들어와서 일을 해달라’고 해서 95년까지 일했지요.

 

그런데 어쩌다 지금은 다큐멘터리 PD로 더 유명해졌습니까.

86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히말라야로 여행을 갔다가 파키스탄과 아프간 국경에 사는 카피르칼라시라는 부족을 취재하는 서양인들을 만났어요. 세 사람 중 하나는 동영상 촬영을, 또 하나는 사진 촬영을, 다른 하나는 글을 쓰는 작가였어요. 친해져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너희는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더니 ‘다큐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프로덕션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나라에서는 프로그램을 방송국에서만 만든다’고 했더니 그들 말이 ‘유럽에서 방송사는 프로그램 관리만 하고 제작은 외주를 준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나도 언젠가는 프로덕션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리고 한참 후인 95년 정부에서 프로덕션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어요. ‘방송의 일정 비율을 외주 제작으로 해서 방송 산업을 진흥하겠다’는 취지였죠. 그 해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다큐 프로덕션을 차렸어요.

 

 

해외에서 외국인들 세명과 기념사진을 찍는 박종우

지프차 본넷을 잡고 기대고 있는 박종우

 

프로덕션이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되던가요.

다큐를 제작하려면 방송용 카메라가 있어야 되잖아요. 지금은 100만원 짜리 카메라로도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지만 그때는 방송 카메라와 일반 카메라가 따로 있었어요. 제일 싼 게 4000만원이나 했죠. 그때 마침 집을 지으려고 일산 단독택지를 구입해 중도금을 지불한 땅이 있었어요. 그걸 팔아서 융자금을 갚고 나니 4300만원이 남아 카메라를 샀지요. 그랬더니 카메라 집 주인이 ‘삼각대는 안 사느냐?’고 묻기에 ‘얼마냐?’고 했더니 ‘600만원’이라더군요. 그 밖에 마이크, 음향장비, 조명도 필요하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돈을 더 빌려서 장비를 구입했지요.

 

그래서 처음 찍은 작품이 뭔가요.

프로그램을 제작하려면 편집기가 필요하다는 건 베트남에 가서 촬영을 마치고 온 후에야 알았어요. 그런데 가격이 3000만원이나 했어요. 편집을 못하고 있다가 다른 프로덕션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겨우겨우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그걸 들고 KBS 교양국을 찾아갔더니 ‘지금까지 만든 게 뭐가 있냐?’고 묻더군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더니 ‘우리는 방송 경험이 있는 사람하고만 일한다’며 ‘결과물을 가지고 와서 얘기하라’는 거예요. 궁리하다가 눈높이를 낮춰 케이블방송 여행채널을 찾아가 일을 시작했어요. 지나고 나서 보니 무모하기 짝이 없었어요. 방송은 동영상 찍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편집, 자막, 그래픽, 음향이 어우러지는 종합 장르지요. 그래서 바닥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2년 고생 끝에 중학생 두 명이 자전거를 타고 백두산에 오른 과정을 그린 다큐를 찍었어요. 그걸 97년 SBS 어린이날 특집으로 방송했어요. 내 작품이 처음으로 공중파를 탄 거지요. 그 후로 KBS에서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얼마 후 Q채널, 인천방송, 부산방송에서 장기 기획물을 만들자는 의뢰가 들어왔어요. 두 도시가 바다를 끼고 있으니 바다를 주제로 1년 54주 동안 시리즈물을 만들어달라는 거예요. 30분씩 54편을 만들기로 하고 해외촬영을 위해 환전을 하려는 참에 IMF가 터졌어요. 그러고는 달러가 폭등하는 거예요. 한국일보 경제부 기자에게 물어봤더니 ‘최소 3년은 간다’며 ‘외국 나가서 하는 일은 포기하라’고 했지요. 방송사들도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계약 위반에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아까운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요.

 

 

잠수복을 입고 바닷가 작은 배 위에 앉아 있는 박종우

 

 

그의 얘기를 듣고 보니 ‘오늘의 거장도 첫걸음을 뗄 시절에는 아무것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갖은 조사를 다 해 보고도 이리저리 재다 끝나는데, 그는 일단 저지르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습니까.

환란 이후 방송가에 가장 먼저 내려진 조치가 외국 프로그램 방영 금지였어요. 나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외국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할 일 없이 놀았지요. 그런데 내가 여행을 좋아해서 나이가 들면 하고 싶은 일이 게스트하우스 운영이었으니 그걸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귀한 달러를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죠. 삼청동 복덕방에 가서 ‘방이 많은 집을 소개해 달라’고 했어요. ‘마침 그런 집이 있다’고 해서 가보니 삼청파출소 뒤 3층 집이었어요. 60년대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집이었는데 돌보지 않아서 낡을 대로 낡았고,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살던 사람이 이사 갈 때 잡동사니를 버리고 가서 1층은 쓰레기 더미였고, 2·3층에만 사람이 살았어요. 옥상에는 텃밭이 있고, 천장은 물이 새고, 도저히 사람이 살만한 집이 아니었어요. 건축가를 데려갔더니 ‘리노베이션하면 쓸 수 있겠다’고 해서 주인 할머니를 만났어요. 할머니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낳고 기른 집이고, 그 추억이 서린 만큼 크게 고치지 않고 보존해주면 장기 계약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5년마다 갱신해 달라’고 했어요. 계약을 하고 나서 ‘달러를 벌 수 있다’며 삼촌을 설득해 돈을 빌리고, 유학 갔다 와서 영어를 잘 하는 사촌 동생을 매니저로 영입하고, 집도 고쳤어요. 상계동 전세를 빼서 그 집 3층으로 거처도 옮겼지요. 그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게스트하우스를 만든 거예요. 이름을 ‘더 게스트’로 붙이고 기다렸지만 손님이 안 오더라고요. 궁리 끝에 김포공항에 브로슈어를 쌓아 놓았지만 1주일에 한두 명 올까 말까 했어요.

 

 

여러 명의 (외국)어린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박종우

 

 

장사가 안돼서 어떻게 했습니까.

한심했어요. 동기 중에 기자를 하다가 스포츠조선으로 가서 전산실장을 하던 김주연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이 친구가 컴퓨터 전문가였는데 의논을 했더니 ‘요즘은 인터넷 홍보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홈페이지라는 게 있는데 그걸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요즘 외국인들은 편지 대신 이메일이라는 걸 이용하는데 이메일을 쓸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으면 와서 이용하고 잠도 자고 갈 거다.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놓으면 된다’고 했어요. 그 말에 솔깃해서 그대로 하기로 했죠. 그런데 광화문에는 외국인들이 붐비지만 삼청동까지는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인터넷카페를 별관으로 만들어, 삼청동으로 유인하기로 했어요. 옛 한국일보 건물 앞에 있던 경제통신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어요. 무허가 건물이라 요식업을 할 수 없어서 CNN, BBC 같은 외국 언론사들이 입주해 있었어요. 외국 언론사들이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당시 한국에선 시위와 쿠데타가 일상이다 보니 창문만 열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광화문 앞에 시위대와 군 병력, 탱크를 찍을 수 있었거든요. 월세 200만원에 계약을 한 후 경제 통신사가 사용하던 윤전기를 치우고 한국 최초의 인터넷카페를 만들었어요. 코리아타임스에서 기사를 내줘서 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단시간에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장소가 됐지요. 기억에 남는 일은 카페 앞 주택은행 2층이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사무실이었어요. 그분이 맥주를 좋아하셔서 가끔 와서 같이 마시면서 얘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한국일보 기자들도 커피를 팔아주고 해서 1년 만에 자리를 잡았지요. 그런데 나도 모르는 동안 여행전문잡지 ‘론리플래닛(lonelyplanet)’ 기자들이 들렀다가 내 가게에 관한 기사를 실었어요. ‘지저분한 여관뿐이었던 한국에도 깨끗한 숙소에, 영어 하는 매니저가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생겼다’고요. 그날부터 방이 꽉 차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게스트하우스는 흑자고 인터넷카페는 계속 적자를 봤어요. 잘 되는 게스트하우스의 이익은 삼촌이 가져갔지만 커피를 파는 내 인터넷카페는 돈이 안 됐어요. 그러던 와중에 경제가 IMF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외국 프로그램 규제가 완화되고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처음에는 단기 제작 의뢰가 들어오더니 점차 장기 의뢰도 들어왔죠. 그러는 와중에 5년이 지나서 삼청동 게스트하우스 임대 만기가 돌아와 계약 연장을 요구했더니 할머니께서 아들이랑 얘기하래요. 할머니 아들이 요즘 김영란법으로 유명한 김영란 전 대법관의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였어요. 그분 말씀이 ‘이 집을 내가 팔려고 하니 당신이 사는 게 어떻겠냐’며 ‘5억4000만원을 달라’고 하길래 ‘내가 1억을 투자해서 수리했으니 깎아 달라’고 했죠. 일리가 있었는지 그분이 ‘4억원까지 깎아주마’고 했어요. 그 집을 너무 사고 싶어서 삼촌을 찾아가 ‘게스트하우스가 잘되고 있고, 부동산 가치는 오를 테니 일석이조다. 우리가 매입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삼촌은 재산이 부동산에 잠겨 있어서 현금이 없었어요. 결국 그 집을 사지 못했어요. 인터넷카페도 내놓았는데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웬 사람이 찾아와서 ‘인터넷카페가 자기 사업 아이템과 맞는다며 포토그래퍼도 필요하니 당신이 같이 일하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 구상이 황당했어요. 그 사람이 말하길 ‘시민들이 돌아다니다 눈에 띄는 기삿거리가 있으면 인터넷에 올리는 사업’이래요. 그래서 ‘돈은 어떻게 버냐’고 했더니 그건 모르겠대요. 황당하더라고요. 그래서 ‘업체 이름이 뭐냐?’고 했더니 ‘오마이뉴스’라는 거예요. 그런 제안이 시덥지 않아서 다큐멘터리 프로덕션 사무실을 여의도에 내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죠.

 

 

그는 오늘날 대안 언론으로 자리 잡은 오마이뉴스의 원년 멤버로 참여할 기회를 비껴간 것이다. 공사다망한 것만큼이나 인생 또한 파란만장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제작한 영상과 사진 작업을 소개해 주세요.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고정물로 ‘도전지구탐험대’, ‘그것이 알고 싶다’, ‘TV동물농장’ 같은 여행, 교양, 다큐물을 만들었어요. TV동물농장은 당시 미국에서 ‘서바이벌’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어 벤치마킹하려고 했는데, 연예인 출연료가 비싸니 출연료 없는 동물을 출연시켜보자고 해서 기획한 거예요. 그 프로만 3~4년을 했어요. 다큐멘터리는 2003년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최후의 샹그릴라’ ‘마지막 불의 전설’ 등을 만들었지요. 그러다 2003년 말에 차마고도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 거기에 꽂혀서 2003~2005년까지 3년 동안 차마고도만 작업했어요. KBS에서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을 만들고 난 후, SBS로 가서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을 만들고, 또 인도 중국 티벳 사이 지역의 풍물을 담은 다큐 ‘사향지로’를 제작했지요.

 

수줍게 웃고 있는 외국소녀와 박종우

해외 어느 상가 앞, 면도크림을 듬뿍 바르고 앉아있는 박종우

 

 

박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보노라면 ‘보통 사람들은 스틸 한 컷 만들기도 힘든 장면들을 어떻게 저렇게 한 시간 이상 이어서 촬영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비결이 뭔가요.

회사를 그만두고 87년 히말라야에 처음 갔을 때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어요. ‘여기는 한번 여행 와서 찍고 말 곳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워낙 거대하고 방대해서 장기적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로는 히말라야에 대한 관심을 놓은 적이 없어요. KBS와 일할 때 산악 다큐를 여러 번 만들었고, 엄홍길, 고 박영석 대장을 알게 됐지요. 그들이 젊어서부터 히말라야를 오르내리면서 그곳에 애정이 생긴 것처럼 나도 히말라야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두 분 대장은 원정마다 셰르파를 고용했고, 그 사람들은 히말라야 탐험에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존재였어요. 이렇게 저렇게 애정이 생긴 거죠. 좋은 작품의 근본은 애정이에요.

 

 

부쩍 짧아진 낮의 길이가 느껴졌다. 커피숍 통유리 밖으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이젠 슬슬 사진 쪽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야 할 것 같았다.

 

 

사진 작업과 다큐 제작을 비교하자면 단순히 스틸컷과 동영상의 차이라고 할 수 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본과 플롯이 필요한 동영상이 사진보다 입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서로 보완적이에요. ‘사진만으로는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반면, 영상 작업을 하다보면 ‘사진 한 장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나는 두 가지를 다 하다 보니 보완이 됐어요. 파괴력과 영향력을 놓고 보면 영상이 훨씬 강력하지만 작품을 남긴다는 관점에서 보면 동영상이 사진보다 못하지요. 사진은 내 개인 작업이라는 생각으로 계속해 온 거예요.

 

고공에서 찍은 DMZ 사진

DMZ

 

철원군 비무장지대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고라니 세마리

철원군 비무장지대에서 고라니들이 목을 축이고 있다

 

 

 

국내에는 160여 시군이 있습니다. 그중에 몇 곳 정도 가보았나요.

대부분의 지자체를 구석구석 가봤어요. 국내에서 작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9년 전 까지만 해도 해본 적이 없어요. 모든 작업을 해외에서 해 왔으니까요. 그러다 2009년 비무장지대를 작업했어요. 국내에서 처음 장기 취재를 해보니 ‘우리나라에도 여러 가지 할 게 많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른 사람들이 거의 손을 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할 게 많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비무장지대 작업을 2년 동안 했지요. 재작년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 전시를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하면서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볐어요.

 

 

촬영을 위해 장소 헌팅이나 조사를 늘 하시겠습니다.

그렇죠. 늘 하는 편입니다.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고, 여행을 다닐 때마다 주의 깊게 살피고 있어요.

 

촬영할 때 잘 먹히는 촬영지의 특성 같은 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작업은 밖에서 하는 촬영이라 지역보다는 오히려 기후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오늘같이 날씨가 쾌청한 날은… 정말 드물어요. 이런 날 서울에 있으면, ‘어디 가서 작업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외국에는 이런 날씨가 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며칠 안 돼요. ‘어디로 가서 작업해야 하는데…’ 하는 조바심이 들지요.

 

 

강원도 인제의 대암산 용늪

강원도 인제의 대암산 용늪

 

 

 

박 감독께서 돌아본 국내 여행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입니까.

관광지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편차가 큽니다. 일반인과 전문가의 시각 차이도 크고요. 다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자체들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계속 뭔가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풍광이라는 것은 건드릴수록 망가지게 마련입니다. 손을 댈수록 품위가 떨어집니다. 예산을 쓰면서 주위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조형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자체들이 관광 인프라 구축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유네스코 등재에 따른 한양도성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이렇게 아름다운 성이 있다는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비를 해 나가면서데크를 깔고, 조명을 달았습니다. 도성에 인공미가 가미되면서 본연의 모습을 잃어 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쓸데없는 간섭으로 기품을 잃은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 쓸데없는 개발이 난무하고 있다’는 걱정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여행 기자를 하면 할수록 우리나라에 숨겨진 비경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혼자만 알고 있는 비경이 있습니까.

없는 것 같습니다. 아! 한군데 있네요. 봉화 승부역이 좋았습니다. 역은 손을 댄 곳이지만 주변 풍광은 자연 그대로였습니다.

 

박 감독께서 촬영 장소를 물색할 때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사람들이 건드리지 않은 곳에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하지만 건드리지 않은 곳을 찾기란 정말 힘듭니다.

 

 

철원군 비무장지대를 덮은 새벽안개

철원군 비무장지대를 덮은 새벽안개

 

 

 

 

우리나라에서 관광자원이 가장 풍부한 지자체는 어디입니까.

남해군, 평창군 등입니다. 우리나라도 다른 외국 못지않게 좋은 관광자원을 가진 나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풍경사진 혹은 여행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까.

좋은 사진이 뭐냐에 대한 관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칼로 무 자르듯이 ‘이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인들의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여러 가지 덕목 중 중요한 것은 관찰력입니다. 관찰력을 키우려면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관심을 기울여야 좋은 순간을 잡을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장비가 워낙 좋아져서 기술적으로 잘 찍고, 못 찍는 차이는 없습니다. 기계가 알아서 해주니까요. 결국 ‘어떤 장면을 어떤 시간에 어떤 빛으로 포착하느냐?’의 문제지요. 다시 말해 ‘어떤 시간이냐’는 ‘어떤 빛이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빛이 피사체를 어떻게 때리느냐’에 대해 집착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을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게 관건입니다.

 

포천 비둘기낭 폭포

포천 비둘기낭 폭포

 

임진강 작업중 촬영한 천연기념물 저어새

임진강 작업 중 촬영한 천연기념물 저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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