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04
대한민국 1세대 바리스타, 커피 명인 박이추
무게감 있는 드립 커피를 국내에 퍼트린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 명인을 만났다.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사진 우현석, 보헤미안 박이추커피공장, 최병훈(사진작가), 박은경, 한국관광공사 DB
15년 전 맛집 담당 기자를 하던 시절 한 번은 강남에 꽤 이름난 원두커피집 사장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와 몇 마디 말을 섞어 본 후 실망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자기가 운영하는 커피숍의 유명세에 걸맞지 않게 커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집은 아직도 같은 자리에서 꿋꿋하게 영업을 하고 있다. 바리스타에 대해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또다시 커피 명인(名人) 기사를 작성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반신반의 하는 심정으로 강릉에서 ‘보헤미안 박이추커피공장’을 운영하는 박이추 명인을 취재하러 갔다. 인터뷰를 한 날은 새벽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여명이 밝아오기도 전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상청은 “영동 지방에 눈이 30cm 이상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했다. 차를 가지고 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강릉까지 가기로 했다. 버스에서 창밖으로 내다본 세상은 온통 순백이었다.
‘보헤미안 박이추커피공장’은 강릉 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다. 불순한 날씨로 서둘러 출발한 덕분에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했는데 거의 동시에 박이추 대표도 공장으로 들어섰다. 카페 1, 2층에는 손님들이 들어차, 우리는 후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시작했다.
일본 억양이 강하신데 고향이 어디십니까.
규슈 오이타의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근처에 온천이 있었지요.
시골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커피와 인연을 맺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배운 거예요. 학교를 졸업하고 낮에는 트럭 운전을 하고, 오후에는 커피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1년 반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커피연구소 가라사와 소장으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고 한국으로 건너왔어요. 귀국한 이유는 형이 서울공대에서 우주항공을 전공하고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의지가 됐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목장을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홋카이도 목장에서 기술을 배웠는데 그걸 밑천으로 우리나라에서 목장을 하려고 했던 거지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성우리에서 목장을 시작했어요. 72년에 땅 2만5000평을 사서 젖소를 사육하다가 경기도 광주군 오포에 6만평을 매입해서 목장을 옮기려고 했는데 일이 복잡해졌어요. 인접한 땅 주인이 100명이나 돼서 목장을 하려면 그 사람들 동의를 받아야 했거든요. 중단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광주군 오포면의 산속 깊숙이 들어가 버렸지요. 그런데 오폐수가 나온다고 민원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또 서울 하계동으로 목장을 옮겼는데 소들이 병이 들어서 시름시름 앓았어요. 도쿄로 돌아가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문막에서 4~5년간 목장을 했어요.
목장을 하던 분이 왜 커피로 전향하셨습니까. 혹시 목장을 반대하는 지역민들의 텃세 때문입니까.
시골에서 소를 키우는 일이다 보니 반발이 있었던 것이라고 이해해요. 문막에서 목장을 하던 86년경 갑자기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86년 9월에 목장부지를 매각하고 도쿄 신바시 커피학원에서 1년을 배운 다음 혜화동 로터리에 커피숍을 냈지요. 88년부터 90년까지 했는데 데모가 심해서 고려대 후문으로 옮겨 10년 가까이 커피숍을 운영하다가 2000년 7월에 서울을 떠나 진고개 휴게소에서 1년 반 동안 커피숍 겸 야영장을 운영했어요. 그리고 또다시 경포대 바닷가로 옮겨 3년 동안 커피숍을 운영했지요. 2004년에는 대관령 옛길의 3층 건물을 인수해서 펜션 겸 커피숍을 운영했어요.
이쯤 되면 역마살도 대단한 역마살이다. 목장과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주유천하(舟遊天下) 하던 그는 2000년 단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커피학교를 개설한다. 그는 주임교수로 서울과 천안에서 일주일에 각각 하루씩 강의를 했다. 강릉에 살고 있는 그는 2004년 관동대에 커피 바리스타과정을 개설했고, 강릉세무서 인근 아이스링크 앞에 건물을 매입해서 커피숍을 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박이추 대표는 ‘커피 1세대’라는 인식을 굳혔다. 그리고 ‘인스턴트 다방 커피’가 차 문화를 석권하던 시절 우리나라에 로스팅 커피의 향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어떤 이유로 강릉에 자리를 잡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릉에 터를 잡아 이곳을 커피의 성지로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다의 포용력이 좋았어요. 서울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시달린 기억도 있었고…. 그래서 한갓진 곳에 가서 일을 하고 싶었어요. 옛날에는 도시가 그리워서 돌아갔지만 다시 조용한 곳을 찾게 된 거죠.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교육은 도시에서 받았거든요. 하지만 저는 자연이 좋아요. 목장을 하게 된 것은 부모님이 자금을 대준 덕분이고요.
업체 이름을 ‘보헤미안’이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지은 게 아니고 일본의 가라사와 카조 커피연구소 소장이 지어 준 거예요. 그분으로부터 1986~1987년 교육을 받았어요. 그분이 서울을 찾아와서 이름을 ‘인터내셔널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이라고 붙여줬어요. 그런데 그 이름이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된 거지요. 이 일을 시작하고 카조 씨에게 내가 볶은 커피를 보내서 검사를 받았어요. 어떤 문제가 있고, 개선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10년 가까이 검증을 받았지요. 배합과 로스팅 등에 대해 10년 동안 자문을 구했고요.
아마도 그의 커피 실력은 이 기간 완성된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커피에 관한 그의 식견에 깊이가 느껴졌다. 그래도 한 번 더 그의 깊이를 가늠해보고 싶었다.
원두의 품질, 로스팅, 보관 방법 등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일단 생두가 좋아야 해요. 당연히 로스팅 기술도 적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하고요. 로스팅 점수를 매겨서 85점 이상은 돼야 하죠. 일본에서 번역해 출간한 서적 《커피의 역사》에는 ‘당신의 운명과 팔자를 바꾸는 커피가 맛있는 커피’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이따금 ‘커피를 마시는 이들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에 젖어 들기 위해서 마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우리 업소가 문화를 파는 가게라는 생각을 해요. 요즘에는 행복을 파는 가게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요.
나는 커피에 대해 조금 안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커피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어서 커피의 역사와 향기, 맛을 내는 화학적인 성분들, 그리고 수많은 원두의 종류와 로스팅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전에 다른 커피 전문가를 인터뷰 할 때 그의 전문성을 의심하고, 취재원의 커피에 대한 지식의 깊이를 가늠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박이추 대표는 내가 가진 지식으로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보헤미안 박이추커피공장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이 일대가 ‘300개의 색다른 커피 향이 늘 가득한 커피도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300개의 색다른 커피 향에서 300이란 숫자는 커피점포 수를 얘기하는 겁니까.
네. 맞아요. 이곳에는 정확히 280개 정도의 커피전문점이 있어요. 그중 원두를 볶는 집은 100곳 정도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일대에 커피를 가르치는 곳이 너무 많아요. 20여 곳이나 되거든요. 커피전문점의 숫자에 비해 커피를 가르치는 곳의 숫자와 배우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느낌이에요. 어쨌거나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커피타운이 형성된 거지요. 커피타운은 강릉뿐 아니라 양양, 동해, 속초 등에까지도 생겨났으니까요.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박이추커피공장이 있는 사천면에서 커피 거리로 유명한 안목 일대까지는 11km 거리인데 그 해변도로를 따라 커피전문점이 줄을 지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안목해변 커피거리는 자판기 커피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강릉항이 있는 안목의 커피거리는 토박이들에게는 특별한 장소다. 다방밖에 없던 1980년대, 안목의 자판기 커피는 다른 지역 자판기 커피와는 전혀 다른 맛을 냈다. 커피 자판기에서 나오는 커피가 단순한 믹스 커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판기마다 각자의 레시피가 있어서 커피 맛이 각각 달랐다. 자판기 주인들은 자신이 관리하는 자판기 속 커피에 프림, 설탕에 더해 콩가루를 넣거나, 미숫가루를 넣는가 하면, 커피와 프림, 설탕의 비율을 달리했다. 바로 그 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안목의 커피 자판기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고, 원두커피의
메카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2009년경부터 커피 아카데미와 보헤미안, 테라로사, 언덕 위의 바다 등 같은 커피전문점들이 들어섰고, 그해 10월 30일 제1회 강릉 커피축제가 열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초에 강릉이 지금과 같은 커피의 메카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까.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커피하고 가까워지고 싶어서 강릉에 내려왔을 뿐이지요. 저는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다만 종교인으로서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은 있었죠. 저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먹고 살기 위해서 커피공부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요. 처음에는 제가 커피 위에 있고, 커피가 제 아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10년 쯤 이 일을 해보니 커피가 제 위에 있고, 제가 커피 아래에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 후로 그런 생각들이 엇바뀌면서 발전을 거듭했지요. 이제는 커피보다 커피를 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 커피마스터에게 들은 얘기인데 숍에 손님이 들어오면 나와 손님 사이에는 커피를 만드는 행위가 있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의미를 알 것 같아요. 또 ‘커피가 맛있다, 맛이 없다, 하는데 커피가 무슨 죄가 있느냐?’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이제 그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반적인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의 깊이로 발전하는 과정인 거지요.
우리나라 커피 관련 서적은 기술적인 내용이 많지만, 일본에는 문화적인 부분에서 접근하거나 철학적으로 파고든 서적이 많아요. 일본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철학이 있는 데 반해 우리나라에는 지식과 상식만 넘쳐나고 있어요. 진정한 커피전문가는 없고, 기술자들만 넘쳐 나는 거지요.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8월 현재 커피전문점 숫자는 3만6000여 곳이다. 상시 해고와 청년 실업이 일반화되고 있는 가운데 커피전문점이 그나마 적은 돈으로 시작할 수 있는 소규모 창업 종목으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다. 스타벅스 같은 기업형 커피숍들이 이미 시장을 장악했고, 가맹점 1000여 개를 바라보던 대형업체도 도산하는 것을 보면 커피전문점은 이미 레드오션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장이 이미 포화 상태라는 일각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1인당 커피 소비량이 선진국에 못 미치고 있다는 통계를 들이대면서 퇴직자들에게 창업을 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되는 가게는 살아남고 안 되는 가게는 사라질 거예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업체들이 살아남겠죠. 국내 업자 중에는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에서 커피농장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앞으로는 이렇게 농장을 겸업하는 형태로 발전하리라고 생각해요. 저도 라오스에 2번 다녀왔어요. 한국 사람이 커피농장을 운영하면서 생두를 생산하기 시작했거든요. 라오스에 45만평의 농지에서 40만그루를 재배하는 커피농장이 있는데, 그곳 땅을 임대받아서 내년 7월부터 커피농장을 시작하려고 해요. 내년에 커피묘목을 생산해서 식재할 생각이에요. 케냐와 파나마 게이샤르 두 종자인데 4년부터 수확할 거예요. 라오스에서 생산되는 커피는 지금 당장에라도 수입할 수 있지만 2018년 동계올림픽이 열리니 그런 이벤트를 엮어서 시작할 생각이에요.
보헤미안 박이추커피공장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2014년 11월 17일 오픈했어요. 이곳은 강릉MBC가 투자해서 운영하고 있지요.
커피전문점들은 강릉의 대표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사람들은 내 공(功)이 크다고 하는데 커피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많이 생기고 전문점이 많이 들어선 덕분이에요. 그리고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여러 요소가 어우러지면서 이곳이 커피의 메카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지요. 저는 사람들을 피해서 커피에 가까워지려고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인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커피축제까지 생기게 될 줄은 몰랐지요.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초기에 축제를 시작했을 때는 기뻤어요. 하지만 문화적인 방향으로도 나아가야 하는데, 산업적인 방향으로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요. 그래서 ‘새로운 땅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요. 한편으로는 ‘이곳을 커피를 볶아서 여러 곳에 공급하는 생산기지로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액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돈을 투자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어요.
어떤 사업모델을 구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내년 10월에 열리는 축제 전까지는 라오스의 커피나무 한 그루를 20만~50만원 정도에 분양하려고 해요. 투자자들이 단순히 커피를 마시고 소비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라오스에서 커피 수확 체험도 하고 커피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문화를 확장해 나가고 싶어요. 생산만 할 게 아니라 라오스 현지인들을 고용해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공생의 비전을 제시하고 싶어요. 며칠 전에는 울진에서 강구까지 돌아보고 왔는데 바닷가에 조그만 커피숍들이 생기고 있더군요. 저는 커피 문화를 발아시킬 수 있는 제3의 후보지를 물색하러 다니고 있어요. 2020년에는 강릉에서 포항까지 철로가 완공된다는데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거지요.
일부에서는 우리나라가 좋은 원두를 구매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원두커피의 맛이 아직은 외국에 비해 못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모든 커피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어요. 서울에는 85점 이상 받는 전문점들이 생기고 있으니까요. 생두의 질이 좋아지고 있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어요. 원두의 질이 좋아지려면 바리스타뿐만 아니라 감별, 재배하는 분야까지 외연을 확장해 나가야 해요. 우리나라 커피 관계자들이 재배와 생산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지요. 커피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생장하듯 사람도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커피를 알게 될수록 인간적인 발전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생산과 소비만 늘고 있을 뿐이지요. 커피 문화와 철학은 퇴보하고 있어요. 커피를 마시면서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우리는 맛만 보면서 소비만 하고 있지요. 그래서 어떤 분은 저에게 커피를 함부로 가르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평생교육원 등에서 교육을 할 때 커피숍 낼 생각은 하지 말고, 살아가면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해요. 인간적으로 성숙한 사람만 커피숍을 할 자격이 있다는 얘기죠.
원래 커피가 좋아서 이 일을 시작하신 겁니까.
아니에요. 먹고 살려고 시작한 일이에요. 저는 원래 농부였기 때문에 농장을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돈과는 궁합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사람과도 궁합이 맞지 않아요. 다만 개성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지요.
커피를 맛있게 마시는 요령이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전문점에서 마실 때는 소문난 집을 찾아가서 드세요. 아무 데서나 마시는 건 음료에 불과할 뿐이에요. 집에서 맛있는 커피를 드시려면 이미 볶아서 포장해 놓은 커피를 사지 말고 바로 볶아 나오는 커피를 사야 해요. 배전기에서 나오는 원두를 눈으로 확인하고 구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요. 물론 번거롭기는 하지만요.
(그가 추천하는 커피 원두 구입 방법은 향이 날아가기 전의 갓 볶은 원두를 사라는 이야기였다.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방법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어졌다.)
커피 한 잔을 내릴 때 적당한 원두의 양은 12~17g이에요. 그 분량을 분쇄해서 90~93도의 물로 1분 30초~2분 사이에 내려야 해요. 내리는 물의 양은 100~150cc 정도가 좋아요. 핸드드립을 할 때는 불순물이 안 나올 정도로 내려야 하지요. 핸드드립 기술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프렌치프레스를 이용하세요. 불순물을 줄여서 불면증 등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구체적인 수치와 디테일한 설명이 그의 실력을 입증하고 있었다. 장인(匠人)은 철학에 더해 구체적인 방법론을 장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박이추 대표는 두 가지를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억양이 심했다. 7년 전 인터뷰했던 김성근 한화이글스 감독의 억양과 흡사해서, 대화 내용의 90%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그의 실력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박이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