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부 메뉴 바로가기
  • 정보공개

  • 국민참여

  • 사업

  • 알림

  • 공사

통합검색
국문 > 알림 > 청사초롱 > 투어 스토리

투어 스토리


발행호 477 호

2017.02.03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대중음악을 설명하는 그의 이야기는 깊이와 재미가 있어 언제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다.

글, 사진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장소협찬 피터폴앤메리

 

문화부에서 대중음악 담당을 할 때다. 취재차 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와 JYP 사무실에 들르면 근처에서 일본인 관광객들과 중국인 관광객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날이 궂으면 인근 커피숍에 앉아 있기도 하고, 날씨가 좋으면 기획사 출입문 앞에서 있다가 스타들이 드나들 때 사인을 요구하거나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기자는 그 모습을 보고 일본으로 취재를 떠났다. 그때 찾은 도쿄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은 별천지였다. 지금은 열기가 많이 식었지만 2012년, 신오쿠보는 한류의 열기에 몸이 달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소녀시대 등 걸그룹의 브로마이드를 판매하는 기념품점과 한국식당 앞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데 반해 건너편 차이나타운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뜨거웠던 한류가 요즘 들어 예전만 못하다기에 그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쪽 분야의 전문가는 여럿이 있지만 그중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씨가 이 현상에 대해 가장 명쾌한 답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와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해박한 지식으로 대중음악을 설명하는 그의 이야기는 깊이와 재미가 있어 언제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동장군의 위세로 칼바람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운 날, 그를 덕수궁 안에 있는 조용한 찻집에서 만났다.

 

 

선생님 연배에 음악평론가는 보편적인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음악평론가의 길을 걷게 됐습니까.

보편적인 직업으로 생각하고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91년에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음악계로 들어올 때 불안하고 힘겨운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했습니다. 그래도 이것이 필생의 사명이고, 중학교 3학년 이후 꿈꾸어 오던 자아실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뒤도 안 보고 신문사를 나왔습니다. 신문사를 나오던 날, 동료 기자가 나를 배웅하면서 ‘잘못하면 패가망신할 것’이라고 충고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 말은 어려울 때마다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나오는 출연료 하나만으로 생계를 이어간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5개월을 버텼던 힘든 시절이 어려울 때 나를 추스르는 발판이 되어 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두 차례 암담한 시절을 경험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신문사에서 나와 음반 제작일을 했는데 실패해서 빚을 떠안게 된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90년대에 1억8000만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었으니까요.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을 키우면서 빚의 구렁텅이에서 겨우 벗어났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려져 있는 헤드셋 

 

선생님의 평론을 듣다 보면 깊이 있는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론을 할 때 많이 아는 게 중요합니까, 아니면 쉽게 이야기하는 게 중요합니까.

청중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내가 음악을 많이 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고 보니 ‘음악에서 많이 안다는 게 뭘 의미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음악은 많이 듣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들으면 표현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들은 걸 쉽게 전달하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평론도 중3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지요. 그게 안 되면 실패한 평론입니다. 호소력을 앞세워 감동을 창출하는 장르가 음악이니까요. 쉽게 이야기하고 글도 그렇게 쓰려고 합니다. 그것이 좋은 평가를 받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쉽게 이야기 하는 것보다 고민했던 것은 노래 부르기였습니다. 강의나 평론을 하다가 노래가 필요할 때는 CD를 틀어줄 수도 있고, DVD를 틀 수도 있는데, 오디오 기기를 이용하다 보면 강의 흐름이 끊기더라고요. 그 순간에 수강생들은 떠들거나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부르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10년 전부터 노래를 직접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부터 여기저기서 불러 주더군요.

 

 

CD나 DVD보다 직접 부르는 노래의 스킨십이 강렬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강의나 방송은 그렇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만, 글은 감옥입니다. 글 쓰는 일을 좋아하긴 하지만, 저는 늘 글쓰기에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아파트를 한 바퀴 돈 적도 있습니다. 한 번은 글을 쓰다가 ‘우악스럽게’라는 표현이 생각이 나질 않아서 ‘거칠게’라는 표현을 쓰고만 적도 있습니다. 글을 쓸 때는 ‘리드(lead)를 어떻게 잡을까’, ‘사람들이 공감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에 대해 주로 고민하지요.

 

 

대중음악의 어떤 면이 선생님을 그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겼습니까.

중3 겨울방학 때부터 고1 개학하는 3월까지 긴 방학이 이어졌습니다. 1974년 우리 집이 유리가게를 해서 아버지께서는 늘 작업장에서 트랜지스터를 켜 놓고 일을 하셨지요. 그때 처음으로 음악을 듣겠다고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음악에 빠져들었지요. 카펜터스, 존 레논, 엘튼 존, 이장희, 신중현 등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음악은 예술이 아니라 요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멜로디를 써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린 나이였지만 ‘글을 잘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아름다움을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창조한 것을 재해석하는 평론가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음악을 할 생각은 없었느냐?’고 물어보는데 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음악가들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팝송 가수나 음반표지 포스터(ABBA, Brown Dirt 등)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전문가를 만난 김에 조금 색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어졌다.

 

 

저작권과 음원료 배분 등과 관련해서 가수들의 불만이 많습니다. 아티스트들이 경제적으로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트리밍 이용료가 음악계로 넘어와야 하는데 그 돈이 음악계로 들어오지 않고 통신사 등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비중이 높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음악 산업 자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국이 돌파구를 찾아 정상화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티스트들이 주장을 관철시키려면 그들 스스로 나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들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요즘 들어서는 음원 다운로드 숫자가 시원치 않습니다. 상황을 타개하려면 공연 쪽으로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인디밴드의 아성이라는 홍대 앞에서조차도 스타가 서지 않으면 청중들이 모여들지 않습니다. 지자체들도 앞다퉈 좋은 공연장을 지어 놓고는 사람들을 불러들일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중 친화적인 면에 있어서 우선적 지위를 영화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돈 모아서 음반을 샀는데 지금은 월 9000원이 안 되는 돈으로 무제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돼 버렸습니다.

 

 

나는 내가 모르는 걸 더 물어보고 싶어졌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음악에 왜 젊은이들은 그토록 열광하는지, 왜 그들은 아름다운 곡조와 가사보다 춤 동작에 소리를 지르는지,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음악은 시대에 따라 유행의 패턴이 크게 달라지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기성세대들은 아직도 어쿠스틱에 대한 향수가 있고,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댄스뮤직이나 힙합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두 흐름간에 간극이 커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음악은 시대 상황이나 시대정신과 같이 발전해 나갑니다. 50~60년대에 배호, 최희준이 부른 발라드와 80~90년대 이문세, 김광석이 부른 발라드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힙합과 EDM(Electronic Dance Music)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젊은 아이들이 할아버지, 아버지 음악을 듣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간극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음악을 안 듣고 자랐는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등요소로 생각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는 근거로 생각해야 합니다. 할아버지는 배호, 아버지는 이문세, 김광석 아들은 인디, 힙합, EDM을 듣게 마련입니다. 세대별로 괴리가 있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다양성이 담보됐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조용필은 예순세 살에 바운스라는 곡을 내놨습니다. 그 음악을 10대들이 다운받았습니다. 아이유가 아버지 세대 가수들과 콜라보를 한 것 봤지요? 김창완의 ‘너의 의미’가 뜬 이유입니다. 다른 세대와 동행하는 움직임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음향기기를 만지는 손 

무대를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뒷모습 

 

 

1996년 데뷔한 H.O.T.와 1997년 데뷔한 젝스키스 등 ‘1세대 아이돌 그룹’이 탄생한 지 올해로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들의 음악은 진화했고, 세련된 모습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아이돌 음악은 천편일률적인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이돌 음악도 장르가 분화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팝, 힙합 등으로 분화되고 있지만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댄스가 갖는 일체화된 통일성이 흡수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요. 이 현상에는 외모가 주는 매력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제는 음악을 얘기할 때 비주얼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세상이 됐습니다. 아이돌의 댄스는 큰일을 이뤄냈습니다.

 

K-Pop이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리라고 예상했습니까.

솔직히 우리 음악이 이런 승전보를 전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기획사, 영화제작자 등 한류 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기획사의 역량과 압도적 군무가 어우러지면서 큰 힘을 낸 것이 성공의

요인이라고 봅니다. 특히 기획사들의 마케팅 역량 덕분에 우리 음악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됐습니다. 이는 한류라는 바람을 만들어냈고,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에 가는 이유 중 하나가 팝송이나 팝스타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한국의 국가적 이미지 개선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스마트폰과 K-Pop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통계를 보니 외국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요소 중 K-Pop이 차지하는 비중이 10%라던데, 그게 작은 수치가 아닙니다.

 

K-Pop이 한류를 이끌어가는 동력의 맨 앞에 있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나 JYP 사무실 근처에는 한류스타를 보려는 외국인들이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K-Pop의 이 같은 흐름이 계속될 것으로 보십니까.

왜 사람들은 유행의 지속성에만 관심이 있을까요? 그건 음악을 산업으로만 보는 심정의 발현이라고 봅니다. 그 질문을 하는 것은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는 심리의 일단을 드러낸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봅시다. 물컵에 우유 몇 방울이 떨어지고, 조금 지나면 물컵의 빛깔은 다시 투명해집니다. 하지만 그 물은 우유가 들어가는 순간 성상이 달라집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외국에서는 청소년들이 K-Pop으로 인해 한국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엠마 스톤이 K-Pop은 중독성이 강하다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클론이 중화권에서 ‘쿵따리샤바라’로 한류를 불러일으킨 게 17년 전이고,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에서 열풍을 일으킨 것은 20년 전입니다. 그에 반해 홍콩 누와르의 수명은 10년 만에 끝났습니다. K-Pop은 20년째 가고 있는 겁니다. 앞으로 열기가 식을 수는 있겠지만 밖에 나가서 외국 팬들과 접점을 마련하는 기능은 유지할 것으로 봅니다. 콘텐츠가 풍부하기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고, 지속성을 담보할 겁니다. 저는 이 같은 우리의 음악적 자산이 자랑스럽습니다. 다만 아이돌 댄스로만 상징되는 한류의 장르에 다양성을 제고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무대 위 의자에 앉아 전자기타를 치는 모습, 기타와 손이 클로즈업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중음악적 자산이 가장 풍부한 지자체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울과 호남입니다. 서울은 대도시의 규모를 바탕으로 탄탄한 지반을 굳혀 왔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창동에 대중음악 아레나를 계획 중입니다. 서울에 있는 공연장 숫자도 적지 않습니다. 뮤지컬의 잠재력과 관련해서는 미국인들도 놀랄 정도입니다. 지자체들도 문화도시다, 혁신도시다 해서 음악 관련 프로젝트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배출한 대중가요 가수들이나 작곡가 등을 놓고 볼 때 전남지역도 음악적 잠재력이 있는 곳입니다. 많은 지자체가 너도나도 박물관을 조성하고 있습니다만 그 많은 곳 중, 대중음악 박물관이 없다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K-Pop을 팔아 돈 벌 궁리만 할 게 아니라 정작 외국 사람들이 와서 한국음악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 하나쯤은 건설해야 합니다. 빅뱅, 싸이, 동방신기가 어떻게 나오게 된 건지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광주와 제주가 기획을 했었는데 모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관광은 음식과 유적, 친절, 음악이 결합해야 진정한 상품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갈 때마다 내쉬빌, 로스앤젤레스, 멤피스 등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스타를 보기 위해 방문한 관광객들과 접점을 찾아서 공감을 끌어내야 선순환하는 관광구조를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진모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기자 / 1986년 대중음악 평론가로 입문 / 1993년 그룹 ‘인공위성’ 매니저

MBC FM ‘임진모의 오일팝송’ 진행 / MBC FM4U ‘스쿨 오브 락’ 진행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 영상물 등급위원회 공연심의위원

 

저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팝, 경제를 노래하다》

 

수상

MBC 연기대상 라디오 부문 공로상

의견쓰기
0 / 1000 byte
등록
목록
  • 담당자 : 양숙희(홍보팀)
  • 전화 : 033-738-3054
  • 팩스 : 033-738-3881

관련콘텐츠

한국관광공사
26464 강원도 원주시 세계로 10 TEL : (033)738-3000 사업자등록번호 : 202-81-50707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09-서울중구-1234호
Copyright © KTO. ALL RIGHT RESERVED.
가족친화 우수기업3.0 공공문화정보 우수개방기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접근성) 품질인증 마크, 웹와치(WebWatch) 2022.10.28 ~ 2023.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