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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스토리


발행호 478 호

2017.03.07

매실 명인 홍쌍리

매실 명인 홍쌍리 

 

평생을 허리 펼 새 없이 매실과 함께 살았다. 손에 주름이 많고 헐렁한 바지를 즐겨 입는다. 노래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능하며 넉넉하게 퍼주는 따뜻한 부자를 꿈꾼다. 매실 명인 홍쌍리 이야기다.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사진 우현석, 청매실농원

 

 

 

 

처녀 때 그 곱던 내 손 어디 가고 무쇠 솥뚜껑 같은 내 손아

여름내 맨손으로 밭 멜 때 손톱 밑에 피가 삐쭉한 내 손아

손 터서 갈라져도 장갑 끼면 갑갑해서 미안한 내 손아

돌맹이로 손때 밀면 시리고 아파서 눈물 질금 나던 내 손아

잠시도 노는 꼴 못 보는 미안한 내 손아 (후략)

 

- 홍쌍리의 시 ‘미안하다 내 손아’ 중에서

 

 

홍쌍리 여사를 인터뷰하기로 한 것은 강릉 취재 때 꽃이 만개한 매화나무 한 그루를 보고 나서다. ‘아차! 강릉이 피었으면 광양은 이미 졌겠다’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달력을 보니 아직은 매화가 만개할 계절은 아니었다. 그래도 부랴부랴 채비를 채려 광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정작 국토의 남단 광양의 매화는 이제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매화철뿐이 아니었다. 그저 특화작물로 성공한 명인 정도로만 알고 있던 홍쌍리 여사는 기자의 예상을 저만치 뛰어 넘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를 찾아 광양으로 향하는 도중 청매실농원에서 “도대체 언제 도착하느냐?”는 재촉 전화가 왔다. 서울부터 네 시간을 달려온 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농원으로 들어가는 순간 옆자리에 동승한 박경자 광양시 문화관광해설사가 흙 묻은 작업복을 입고 밭일을 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말했다. “저기 저 분이 홍쌍리 선생님이에요.”

 

차에서 내린 우리는 밭일하던 홍쌍리 여사의 일을 중단시키고, 실내로 들어가 탁자에 마주 앉았다. 그 누가 흙 묻은 점퍼에 몸뻬바지를 입고 있는 이 노파를 매실 명인 홍쌍리 여사로 알겠는가? 무례한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홍쌍리 선생의 손 

 

나이가 드셨는데 농사일을 아직도 직접 하십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 일자리가 없다고 하는데, 시골에서는 일손을 구할 수 없어서 난리에요. 예순다섯 살이면 정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여든 넘은 이도 일을 해. 내가 스물넷 먹던 해 12월 23일 시집을 왔는데, 오자마자 물동이 이고 오라고 하더군. 내가 부산 살 때 물동이를 이어 본적이 있나? 끙끙대면서 물동이 이고 오다가 매화가 피어 있길래 얼굴을 대봤더니 꽃이 ‘엄마 나와 함께 살자’고 해서 눌러앉았어요. 초여름에 산에 올라가 보니 백합꽃에 이슬이 맺혀 있었어. 그런데 그게 이슬이 아니라 눈물이더군. ‘산에 핀 백합화야. 네 신세나 내 신세나 왜 이렇게 똑같노.…’라고 시를 썼지. 그때 이후로 글을 쓰게 됐어요. 이 일대 45만평에 밤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그걸 베어내고 매실을 심었거든. 그때 내 어깨를 못 쓰게 됐어. ‘5년 후엔 꽃이 피겠지’ ‘10년이면 열매가 열겠지’하는 생각으로 버텼지.

 

이름이 특이하십니다.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나요.

우리 아버지가 정월 초사흘에 나를 낳았어요. 작명소에 이름을 지으러 가서 43년 정월 초사흘 사시(巳時)에 낳았다고 하니 당신이 복이 없어 여자애를 낳았다고 하더래. 그러면서 서로 상(相) 옳을 의(義)자를 지어줬어. ‘넓은 세상에 서로 도우면서 의롭게 살아라’란 뜻이었겠지. 그런데 이게 남자 이름이거든. 그리고 작명소에서 ‘이 아이는 공부시키지 말고, 눌러 키우라’고 하더래. 호적계 공무원이 쌍둥이 쌍(雙)에 임금왕 변에 마을 리(理)로 잘못 기재했어. 그런데 나중 그걸 알고서도 아버지가 ‘딸년 이름이니 그냥 두라’고 해서 이름이 됐어요. 하지만 사주팔자가 어디 가나? 7남매 중 맏이하고 막내만 아들이고 나머지는 딸이었는데,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선생님들이 두세 번 찾아 왔어. 이 아이는 중학교에 꼭 보내라고. 나는 초등학교 때 키가 크고, 노래를 잘해서 합창단을 했어. 서라벌예대에서도 ‘가수 시키겠다’고 세 번을 데리러 왔었다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광대 만들면 안 된다’고 하면서 부산 삼촌에게로 보냈어요.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매화밭을 일궜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다 며느리가 사업을 이어받게 됐나요.

내가 아이 둘 낳을 때까지 시아버지가 ‘도망갈지 모른다’고 친정에 안 보내줬어요. 한 번은 친정아버지가 어떻게 살고 있나 보려고 찾아오셨는데, 내가 시커먼 때가 묻은 털실 옷을 입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나를 못 알아보더라고. 시아버지가 ‘사돈어른 식사하고 가시라’고 잡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딸이 고생하는 걸 보고 밥도 안 먹고 울면서 갔어. 가면서 ‘사돈어른, 우리 딸 양지바른 곳에 집 하나 지어주소’ 라고 청을 했는데 그게 지금 살고 있는 터전이 됐어요.

 

 

수많은 장독대 사이에 독 하나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는 홍쌍리 선생 

 

 

그 후로 오늘날 청매실농원을 일구셨습니다. 사업 수완이 있으셨나 봅니다.

장사를 하려면 퍼줘야 해요. 퍼주는 마케팅, 괜찮은 방법이라니까. 내가 부산에서 밤 장사를 할 때 극장 앞에서 군밤 장사하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밤을 가져갔는데, 1kg 달라 하면 2kg씩 퍼줬어. 그걸 시아버지가 보고, ‘큰살림 살겠다’고 생각했대. 그게 국제시장 일대에 소문이 나서 장사가 잘됐어. 작은 것에 부들부들 떨지 말고, 좀 퍼줘도 돼요. 시장에서 장사할 때 우리 집에는 밥 얻어먹으러 오는 사람들로 꽉 찼어. 밥을 한솥 가득히 해서 퍼먹였는데, 우리 집에 와서 삼시 세끼를 먹고 가는 이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못 찾겠어. 아마 잘 살아서 안 나타나나 봐. 사람이란 게 잘 되면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고 싶거든. 나는 따뜻한 부자가 되고 싶어요. 나눠 먹고 빚 갚을 정도만 되면 되는 거야. 돈 버는 것 보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돼. 우리 집 봐. 이 산속에 대문도 없고, 울타리도 없잖아? 나 이렇게 살아. 나는 이 집에서 가장 큰 머슴이야. 내가 지금은 일 안 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은 내 눈에 안 들어요. 시아버지는 내가 일하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부인에게 못하는 말도 내게 하셨어.

 

시아버지 눈에 들어서 사업을 물려받게 되신 거군요.

그렇지요. 시아버지께서도 내게 형 손 잡고 밥 얻어먹으러 다녔던 일, 더운 방에 잠 한 번 자보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추웠던 기억도 얘기해주셨어요. 시아버지는 일본으로 가서 돈 벌면 밥은 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갔다가 밤과 매실을 가지고 돌아오신 거지요.

 

그 후로 사업은 잘됐습니까.

웬걸? 시아버지가 광산을 하다 망해서 빚을 크게 졌어요. 빚쟁이가 오면 쥐어 뜯길까봐 머리를 깎고 살았어요. 그런 몰골로 마을에 내려가면 사람들이 ‘상이용사 내려온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남편은 홧병으로 드러누웠어요. 아이들도 빚쟁이만 보고 자랐지. 그러다가 남편은 홧병으로 저 세상으로 가고, 나도 스물아홉 살 때 수술을 두 번 받았어요. 장이 들러붙는 협착으로 3월에 수술했는데, 재발해서 7월에 또 했어.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아직 젊더래. 젊은 나이에 죽는 게 아까워서 수술을 한 번 더 해보자고 했다는군. 그때 의사가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해서 지금껏 안 먹고 있지.

 

30년간 매화 농사를 지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까.

이런저런 제품을 해마다 100톤씩 생산하고 있어요. 그런데 3년째 매실 시세가 바닥을 치고 있어. 전북은 복분자, 나주는 배, 제주는 밀감이고, 광양은 매실이 특산이에요. 농사를 지을 때는 어떤 토질에 어떤 작물을 심어서 밥상에 올릴까를 생각해봐야 해요. 매실은 양지바른 곳에서는 잘 안 되는데, 여기는 반음지니까 잘 돼요. 섬진강변 매실은 안개를 먹고 사는 매실이야. 반음지는 북풍받이기 때문에 얼었다, 녹았다 되풀이해서 당도가 높아요. 어떤 과일이든 반음지가 최고야. 일본사람들이 와서 우리나라 매실 맛을 다 보고, 광양 매실을 최고로 쳤어. 하루 중에는 아침에 먹는 매실이 최고야. 낮에 먹는 매실은 말라서 맛이 없어. 농사를 짓다 보니 ‘어느 곳에서 뭐가 잘 된다’고 하면 지자체에서 보조를 해주고, 그러면 너도나도 한 가지에 매달리는데, 그래서는 안 돼요. 나는 매실 농사를 지으면서 학자에게 물어본 적이 없어요. 내가 경험하고 연구해서 내 것으로 만들었지. 나는 뼈 빠지게 일해서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터전을 닦은 거요.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하고 싶은 걸 다 하면 언제 일하나? 나는 지난 50년 동안 단 한 번 놀러 갔어. 무주구천동에 있는 농장에서 길에 돌을 깔아 놓은 곳이 있다고 해서 그걸 배우러 갔었지.

 

장독대 뚜껑 위에 각각 담겨져 있는 음식물(매실장아찌를 손질하여 잘라놓은 것, 매실장아찌, 고추장에 절여 손질하여 잘라놓은 매실장아찌 등) 

 

 

홍 여사의 얘기 속에는 경험칙으로 이뤄낸 철학이 녹아 있었다. 그는 펴낸 책이 네 권이나 됐다. 소처럼 일하면서 글은 언제 썼는지 궁금했다.

 

 

책도 네 권이나 펴내시고, 노래도 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글 잘 쓰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인 거 같아. 난 찔레꽃을 좋아해. 하루는 찔레꽃 밑에 새 한 마리가 죽어 있었어. 그걸 보고 ‘이름 모를 저 새는 엄마를 부르다가 / 찔레꽃 향기 속에 울다가 홀로 잠이 들었네…’ 글을 써놓고 흥얼거리다 보니 노래가 되는 거야. 내가 이래 봬도 열린 음악회에 두 번이나 출연했어. 한 번은 신동엽이 노래 불러달라고 해서 불렀더니 유열이 또 그걸 보고 전화를 해서 전화상으로 두 곡만 불러 달라고 해서 불러준 적도 있어. 내가 예술의전당에서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방송사 사장이 ‘저 끼를 누르고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했다더군.

 

 

악보를 읽지 못하면서 노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니! 이 분이 공부를 했다면 그 능력은 어디까지 뻗쳤을까. 묻혀버린 그의 재능이 아까웠다.

 

 

매화는 청매·홍매·백매가 있고, 열매는 청매·황매·금매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종류와 용도가 각각 어떻게 다릅니까.

홍매는 열매를 쓸 수 없어요. 이쁘기만 하지. 매실 말린 것을 금매라고 하고, 금매는 차를 끓이면 좋지. 매실에 생강, 고추를 넣고, 발을 담그는 족탕을 하면 땀이 비처럼 쏟아져. 얼마나 개운하고, 좋은지 몰라. 집에서 남편에게 그렇게 해주면 남편이 얼마나 좋아하겠어? 출근할 때 웃으면서 나갈 수 있잖아. 남편이 현관문 열고, 퇴근해 들어올 때 ‘너만 힘드냐?’고 하지 말고, 얼마나 상사에게 시달렸을지를 생각해보라고. 밥상 차려주고, 손잡고 걸으면서 당신의 휴식처는 나라고 말하고, ‘걱정거리 다 버리고 집에 들어가자’고 하면 남자들 마누라 보고 싶어서 집에 빨리 와. 남자들이 왜 여자보다 빨리 죽는 줄 알아? 여자 입심 때문에 먼저 가는 거야. 나는 힐러리가 좋아. 나는 힐러리가 쓴 책을 거의 모두 읽었어. 네 번을 읽은 책도 있지. 힐러리는 세계에서 제일 똑똑한 여자야. 난 무식하지만 힐러리 생각을 이해해. 힐러리는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바람 핀 클린턴을 대통령 시키려고 뛰어다녔어. 자기 자신의 성취를 위해서 용서한 거지.

 

 

그의 언변에 놀라 “말씀을 조리 있게 하시는데 책은 자주 읽느냐?”고 물었더니 “500권만 읽으면 누구나 이 정도는 될 수 있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청매실농원에 놀러온 몇명의 관광객들이 하얗게 핀 매화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한옥지붕이 보이는 집 앞, 매화나무에 핀 매화 꽃 한송이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계획은 무슨? 난 그저 일흔다섯 먹도록 싸움을 안 해봤어. 남이 해코지해도 답을 안 하면 돼. ‘왜 나를 무시하냐?’고 시비 거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난 오늘 네 모습 못 봤다. 네 새끼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수그러들어. 싸우면 내 마음 상하는데 싸움을 왜 해? 남이 싸울 때마다 내가 말려서 국제시장에서 해결사로 통했어. 그리고 남을 도우면서 살아야 돼. 아까도 말했지만 삼성경제연구소 이현우 전무가 청매실농원은 퍼주는 마케팅이라고 했어요. 퍼줘야 내가 잘 살 수 있어. 나는 농부 손은 괭이, 삽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 흐르는 물은 내 핏줄이라고 생각하라고. ‘농사를 지어 돈을 벌라’고 하는데 농사는 작품이지 돈이 아니야. 자기 분야에 일을 할 때 영혼을 불태우지 않고, 쉽게 살려고 하는 게 문제야. 일하기 싫으면 밥도 먹으면 안 돼.

 

 

인터뷰를 끝내고 “사진을 좀 찍어야 하니 예쁜 옷으로 갈아입자”고 했더니 “이런 내 꼴 보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기자가 굽히지 않고 청하자 홍 여사는 “그럼 좀 갈아입어 볼까”라며 웃옷만 갈아입고 나왔다. 과연 이 여장부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2016년 지역 명사로 선정한 인물로 손색이 없었다.

 

 


 

 

물방울을 머금은 청매실 

 

약력

청매실농원 대표, 1943년 출생

1996 국무총리상 / 1997 전통식품 매실 명인 제14호 보유자 / 1998 석탑산업훈장, 대통령상 / 1999 농림수산식품부 신지식농업인 장

2000 대산농촌문화상 / 2009 제2회 여수MBC 시민상

 

저서

《인생은 파도가 쳐야 재밌제이》, 《밥상이 약상이라 했제》, 《홍쌍리의 매실 해독 건강법》, 《매실 아지매 어디서 그리 힘이 나능교》, 《매실박사 홍쌍리의 매실 미용건강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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