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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스토리


발행호 481 호

2017.06.07

신병주 교수가 들려준 백제의 그날들

신병주 교수가 들려준 백제의 그날들 白濟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사진 장흠식(그룹A스튜디오), 박은경

 

“무왕이 6세기에 익산을 무대로 활동한 백제의 스타급 왕이었다면, 공주에는 무령왕이, 부여엔 성왕이 있었습니다. …중략… 공산성 입구에 관찰사들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도청 소재지였음을 의미합니다. 관찰사는 도지사에 해당하거든요.”

KBS가 제작해 인기를 끌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로 시청자들과 친근해진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설명은 쉽고 간결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중 백제문화권에 해당하는 공주와 부여 투어에 참가한 블로거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1박 2일 일정의 투어에 동행한 기자도 블로거들과 함께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평소에 품어 왔던 궁금증을 풀어나갔다.

 

신병주 교수가 백제의 옛 도읍 왕성이자 백제 멸망의 아픈 순간을 간직한 공산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신병주 교수가 백제의 옛 도읍 왕성이자 백제 멸망의 아픈 순간을 간직한 공산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백제 초기 도성은 지금의 송파구 풍납동 일대인 위례였어요. 그러다가 북쪽의 고구려를 의식해 한강 남쪽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죠.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번성해서 국력을 팽창시켜 고구려지역까지 쳐들어갔어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을 정도였으니 대단했죠. 반면 고구려는 5세기 광개토대왕 때부터 강해져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어요. 반면 아들 장수왕은 남쪽으로 눈길을 돌렸지요. 예전에는 국가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손쉬운 방법이 땅을 넓혀 노예를 잡아 오는 거였어요. 두 나라가 겨루는 양국 경쟁 시대에는 한 나라가 금세 망하면서 막을 내리기 마련이지만 세 나라의 경우에는 견제와 경쟁을 되풀이하면서 시간을 오래 끄는 게 보통이었지요.”

 

재미있는 옛이야기 같은 신 교수의 현장 해설에 딴청 하는 참가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참가자 중에는 한참 개구질 나이인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 둘이 있었는데, 이들은 실습 내내 신 교수를 밀착 마크(?)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기자가 그중 한 학생인 S군에게 “현장 실습에 와 보니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땐 지루했는데, 막상 역사의 현장에 와서 유명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니 귀에 쏙쏙 들어올 뿐더러 지루하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백제로 가는 시간여행의 문, 공산성 

백제로 가는 시간여행의 문, 공산성

 

 

신 교수의 강의는 다시 이어졌다.

 

“장수왕은 척박한 북쪽 땅 대신 남쪽으로 눈을 돌려 평양으로 천도했어요. 남하정책을 시작한 거지요. 당시 백제의 왕이던 개로왕은 바둑을 좋아했는데, 고구려는 이를 노리고 바둑을 잘 두는 세작(첩자)을 보내 역정보를 흘려 국정 파탄을 유도했어요. 그런 탓에 개로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전사했지요. 그다음으로 즉위한 문주왕은 475년 웅진 천도를 단행, 드디어 웅진시대가 열렸어요. 공주가 ‘곰나루’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웅진나루에 얽힌 전설 때문이에요. 옛날 암곰이 남자를 납치해 함께 살았어요. 남자는 몇 차례 탈출을 시도하다 결국 곰과 살게 됐는데 암곰이 아이를 낳았어요. 곰은 아이를 낳았으니 남편이 더 이상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놓았는데 남자는 기어이 도망을 쳐 버리고 말았어요. 암곰이 울며불며 난리를 치자 배가 가라앉고 해서 곰을 달래기 위한 사당을 나루터 근처에 지었지요. 그래서 이 나루터를 곰나루라고 불렀는데 이게 곰주에서 웅주로 다시 웅진으로 바뀌게 된 거예요.”

 

그의 설명은 정사와 야사를 넘나들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의 강의에 빠져드는 비결인 듯했다. 그의 설명을 좇다 보니 발걸음은 무령왕릉으로 이어졌다.

 

무령왕릉을 둘러보는 참가자들 

무령왕릉을 둘러보는 참가자들.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 고고학 발굴의 최대 성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무령왕릉 앞에서 일행을 멈춰 세운 신 교수는 “이번 현장 답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무령왕릉”이라며 “무령왕은 업적이 많은 왕은 아니지만 무덤이 발견되면서 유명해졌다”고 말했다.

무령왕릉 발굴이 고대 사적의 발견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인 까닭이다. 그는 “1971년 무령왕릉의 발굴은 트로이 발굴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라며 “능의 주인이 확인된 유일한 고분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송산리고분에 숫자가 매겨진 것은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 2, 3, 4, 5…호분이라고 발굴된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붙였다. 무령왕릉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6호분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고분 안에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등 사신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호분은 무령왕릉이 발견되면서 빛을 잃었다.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능인 데다 국보급 유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재현된 1971년 발굴 당시의 무령왕릉 내부 배치 

국립공주박물관에 재현된 1971년 발굴 당시의 무령왕릉 내부 배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은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은잔

 

 

무령왕릉이 발견된 사연도 드라마틱하다. 1971년 여름, 장맛비가 크게 내렸다. 비가 내리자 능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배수로 공사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땅을 파다가 뭔가 딱딱한 게 걸려서 중앙에 보고를 했고,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인 김원룡 교수가 단장으로 내려와 발굴을 지휘했다. 이름 모를 왕릉의 발굴에 언론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드디어 발굴을 시작한 날,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때만 해도 취재윤리나 질서의식이 일천하던 시절이었다. 발굴인력과 취재기자들이 뒤엉키며 북새통을 이뤘다. 그 와중에 사람들의 발길에 숟가락 등 유물이 밟혀 부러지는 일까지 있었다. 신 교수는 “김원룡 박사도 이 같은 사태를 두고두고 후회했다”며 “김 박사는 개인회고록에서 내가 발굴을 제대로 못 해 벌을 받은 것 같다고 회고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여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전시물을 보고 있는 어린이 

참가자들이 부여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백제의 찬란한 흔적들을 엿보고 있다

 

 

이때 발견된 목간은 무덤 조성 당시 일본에서 수입한 금송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목간에 왕의 재위 기간은 501~523년 사이로 기록돼 있었고, 귀한 유품이 4600점이나 발견됐다. 왕과 왕비의 관을 비롯해 국보로 지정된 것만 열두 점에 달할 정도였다. 왜정이 무령왕릉을 발굴하지 못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능의 규모가 커서 산이라고 생각해 발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 

1993년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후 현재 부여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백제금동대향로는 놓쳐서는 안 될 유물이다

 

 

신 교수의 현장 강의는 다음 날 부여까지 간단없이 이어졌다. 강의를 듣던 기자는 신 교수에게 인터뷰를 청했으나, 그는 이날의 목적이 현장 실습임을 내세우며 완곡히 거절했다. 하지만 간청이 이어지자 그는 식사 중에 약간의 시간을 할애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대학 때 사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대학 시절 전공 선택을 앞두고, 사학과는 답사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학과를 택하게 됐어요. 저는 학부 때는 물론이고 대학원 때도 답사를 많이 다녔어요. 건국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해서도 답사는 거의 빠지지 않고 다녔으니까요.

 

박사학위 논문은 무엇으로 쓰셨습니까.

남명 조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산청군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남명 조식 선생의 자취를 보면서 ‘이 분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전공으로 선택했어요. 저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과거와 현재의 소통과 대화라고 생각해요. 역사에도 현장성과 감동이 있어야 하거든요. 박사 논문의 주된 내용은 남명학파와 남명 조식의 제자들, 그 후예들의 업적에 대한 연구였어요.

 

역사학자로 현대를 살면서 소망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언론에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꼭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길이나 거리 중심으로 개편한 새 주소 정책을 재고했으면 합니다. 새 주소는 행정편의적인 면에서 보면 합리적일지 모르나 실생활과는 안 맞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새 주소가 우리의 옛날 지명을 모두 지워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새 주소를 계속 밀고 나간다면 우리 역사의 자취는 모두 지워져 버릴 것입니다. 누가 입안했는지 모르겠지만 새 주소는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 가서 무슨 스트리트니, 무슨 로드 몇 번가(街)니 하는 것을 보고 와서 따라 한 것이겠죠. 하지만 그런 구획 개념은 우리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적으로 마을이 형성된 나라에서는 맞지 않는 주소방식입니다. 요즘 새로 건설되는 신도시 같은 계획도시에 적용하는 것까지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풍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는 서울 같은 오래된 지역에까지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재고해 달라는 얘기입니다. 칼럼에도 이 같은 생각을 몇 번 써 봤지만 아무 반응도 없더군요. 만일 대선 후보 중에 옛 주소 복원을 공약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을 찍었을 겁니다.

 

최근에야 대입 수능에서 국사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됐습니다. 뒤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늦었지만 국사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된 것은 다행입니다.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해 놓았더니 학생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뿐 더러 정말 무지해지더라고요. 시험을 치르지 않는데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나마 한국사 시험이라도 보니까 책이라도 사서 보고, TV에서 방영하는 역사 프로그램이라도 보는 겁니다.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더니, 사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하는 학생들의 숫자도 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국사 선생을 안 뽑았더니 정원도 줄었고, 지원하는 학생들도 감소하는 추세였습니다. 이제는 경쟁률이 높아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휴대용마이크를 들고 진지하게 설명 중인 신병주 교수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변곡점을 꼽으라면 어떤 사건을 꼽으시겠습니까.

저는 조선 건국으로 봅니다. 조선 건국 이전과 이후에 큰 변화가 있었으니까요. 조선시대 역사가 내 전공이기도 하고요.

 

요즘 주한미군의 사드(THAAD) 배치를 놓고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우리나라 땅에서 외세가 맞부닥치고 있는데 정작 우리 정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주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가는 것을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정학적 위치나 전략적 가치를 놓고 볼 때 주변 강국들이 한반도를 넘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저는 그런 위기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잘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처지가 우리만의 특별한 상황은 아닙니다. 영국이 ‘우리끼리 잘살아 보겠다’고 유럽연합에서 뛰쳐나오고, 미국이 트럼프 당선 후 보호무역주의를 들고나오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국제관계는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라 결정되니까요. 그러니 한반도의 상황을 숙명이라고 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만 당해 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유럽의 강국 독일도 세계대전 일으켰다가 망했었고, 일본도 그랬습니다. 현 상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처지를 비관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와의 인터뷰는 곧 끝났지만 부여로 이어진 현장 설명은 이튿날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부여 부소산성 현장 설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삼충사 외관 전경 

부여 부소산성 답사의 출발점, 삼충사. 백제의 삼충신으로 꼽히는 성충과 흥수, 계백을 모신 사당이다

 

“신라는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놓고, 만주의 고구려 영토를 잃었다느니, 우리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 안으로 제한돼 버렸다고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삼국통일 후의 영토는 크게 확장된 셈입니다. 열 번을 양보해서 신라의 국경이 대동강 유역으로 제한됐다고 해도 통일신라 북쪽의 나라가 대조영이 세운 발해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우리의 무대가 좁아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 조선 세종 때를 거치면서 국경은 조금씩 북상해서 압록강에서 두만강 유역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저는 영토를 확장하는 것 보다, 좁은 영토라도 우리 역량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정도를 확보해서 오랫동안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때 중원을 석권했던 몽골이나 여진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를….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국력을 신장시키면서 문화를 융성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백제문화단지 능사 오층 목탑 

백제문화단지 능사 오층 목탑. 높이가 38m에 이른다

 


 

 

PROFILE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

남명학 연구원 상임연구위원회 위원

 

저서

《왕으로 산다는 것》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

《조선과 만나는 법》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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