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10
제주를 품은 공간, 예술에 스민 제주 ②소라의 성·본태박물관·유민미술관
현대건축에 스며든 제주
소라의 성·본태박물관·유민미술관
서귀포 앞바다에는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소라의 성’도 있다. 소라의 성은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고(故) 김중업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1969년 12월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공식적으로는 ‘작자 미상’이지만 설계 기법이나 특징 등으로 볼 때 김중업 선생의 작품이거나 최소한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김중업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소라의 성
소라의 성은 올레 6코스를 따라 소정방폭포 쪽으로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다. 해안 절벽 위에 웅크리듯 서 있는 모습이 바다로 나아가는 달팽이를 떠오르게 한다. 무엇보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살려 만든 4개의 기둥이 인상적이다. 표면에는 제주 바다에서 나는 몽돌이 촘촘히 박혀 건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계단실을 따라 옥상으로 오르면 망망대해가 달려든다. 계단은 완만한 나선을 그리며 2층을 거쳐 옥상까지 이어지는데 통로가 좁고 어두워 마치 소라고둥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나선을 그리며 옥상까지 이어지는 계단
건물은 전망대, 레스토랑 등으로 쓰이다가 2003년 재해위험지구에 포함되어 한동안 빈 공간으로 방치됐다. 이후 서귀포시가 건물과 주변 토지를 매입했고, 2009년 4월부터 최근까지 제주올레탐방 안내센터로 사용됐다. 현재는 보수·보강공사를 거쳐 북카페로 활용 중이다. 비치된 도서는 많지 않지만 여행, 에세이, 소설, 동화 등 꽤 다양한 분야의 책이 꽂혀 있다. 커피도 무료로 마실 수 있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살려 만든 기둥이 인상적이다
현재 북카페로 활용 중인 소라의 성. 커피도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제주에 남은 김중업 선생의 다른 건축물로는 구 제주대학 농과대학 수산학부 건물이 있다. 1971년 작품으로, 지금은 서귀중앙여자중학교로 쓰인다. 건물은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라 한쪽 면만 봐서는 다른 쪽을 예측할 수 없다. 외관상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서쪽 면이다. 직사광선이나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창문에 덧댄 차광막이 독특하다.
서귀중앙여자중학교(구 제주대학 농과대학). 창문에 덧댄 차광막이 독특하다
제주에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손길이 닿은 감각적인 공간도 여럿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이타미 준,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 멕시코 건축의 거장 리카르도 레고레타 등이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재료로 공간을 짓고 채웠다.
눈에 띄는 건축가는 단연 안도 다다오다. 제주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 중 하나인 본태박물관을 비롯해 유민미술관, 글라스하우스 등이 모두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안도 다다오의 작품 본태박물관. 냇물이 떠받치는 노출 콘크리트와 한국의 전통담장이 차분하게 어우러지며 자연의 빛과 바람을 그대로 끌어안는다
본태박물관은 안덕면 한라산 기슭 경사진 터에 자리했다. 본태(本態)는 본래의 형태, 본질이란 뜻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탐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시관에서는 자수 공예부터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까지, 가장 한국적인 것과 가장 현대적인 것을 두루 다룬다. 안도는 박물관의 설립 취지에 따라 제주의 땅에 순응하며 한국의 전통과 현대를 담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는 땅을 일부러 다지지 않고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건물을 설계했다. 중심에는 제주의 전통 담장을 두고, 곁에는 냇물이 따라 흐르며 자연을 품도록 만들었다. 백미는 여백을 바탕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산방산이다. 건물 사이로, 물길 너머로 둥실 떠 있는 산방산은 아름답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다.
본태박물관에서는 가장 한국적인 것과 가장 현대적인 것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건물 여백을 바탕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산방산
유민미술관과 글라스하우스는 섭지코지의 빼어난 풍광 안에 들어섰다. 글라스하우스가 곶의 끝부분에 돌출돼 자연을 압도한다면, 유민미술관은 땅 밑으로 잦아들며 자연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유민미술관은 명상센터 ‘지니어스로사이’로 운영되다 지난해 6월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길 양쪽으로 돌의 정원이 나타나고, 억새가 바람에 사각대는 바람의 정원을 지나 물의 길이 고요하게 펼쳐진다.
섭지코지의 빼어난 풍광 안에 자리 잡은 글라스하우스와 유민미술관. 제주의 자연을 색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
유민미술관 입구 샤이닝 글라스. 섭지코지의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물소리가 잦아들 무렵, 길 끝에서 맞닥뜨리는 차경은 강렬하다. 돌담을 두른 기다란 창에 성산일출봉이 그림처럼 갇혀 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면 어디부터 바깥이고 어디까지가 안쪽인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어느새 훌쩍 높아진 벽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면 전시관이다. 육중한 철문 안에 꾸며진 공간이 오직 그 작품만을 위해 설계된 무대 같다. 현재 전시는 ‘유민 아르누보 컬렉션’이다. 미술사적으로, 또 디자인적으로 의미 있는 프랑스 낭시 지역의 유리공예품 47점을 감상할 수 있다.
돌담을 두른 기다란 창에 성산일출봉이 그림처럼 갇혀 있다. 유민미술관을 채우는 가장 아름다운 전시품은 자연이다
유민미술관에 전시 중인 아르누보 공예예술품
글라스하우스는 땅 위로 솟아오른 모습의 V자형 건축물이다. 정면에서 보면 바다를 향해 기지개를 켜는 듯 보이기도 한다. 건물은 정동향을 향해 지어졌다. 중앙에는 바람이 드나드는 길을 놓고, 앞쪽에는 마름모꼴 모양의 화단을 조성했다. 1층은 지포 뮤지엄, 2층은 레스토랑이다. 레스토랑에서는 성산일출봉과 광치기해변이 한눈에 든다.
글라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