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 내곁에 작곡가
오 태 호
얼마 전 방영됐던 케이블TV 채널의 ‘응답하라 1994’에서는 90년대를 풍미했던 발라드풍의 노래들이 배경음악으로 쓰이며 복고의 향수를 불러일으켰었다. 그중에는 ‘또 다른 시작’ ‘기다린 날도 지워진 날도’ 등 귀에 익은 음악들도 삽입돼 있었다.
이 음악을 만든 싱어송라이터의 이름은 오태호. 가수 이승환과 ‘이오공감’이라는 듀오로 주목을 받았던 가수다. 그는 이승환과 듀오를 할 정도로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가수 오태호는 작곡가 오태호의 명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가 작곡한 곡들은 이범학의 ‘이별 아닌 이별’, 이승환과 그 자신이 직접 부른 ‘한 사람을 위한 마음’,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사이’, 자신의 곡 ‘기억속의 멜로디’, 이승환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등 두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가 작곡가로서 평가를 받는 것은 많은 곡을 히트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현식의 유작 ‘내사랑 내곁에’를 만든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 한 곡으로 90년대 가요계를 단칼에 평정한 작곡가 오태호를 청사초롱이 만나봤다.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여행칼럼니스트) 사진 우현석·오태호·EBS 스페이스 공감
- 당신은 80~90년대 인기 가수이자 쓰는 곡마다 대박을 터뜨리던 히트곡 제조기였습니다. 당신이 작업하고, 부르던 노래의 장르를 규정해 주시죠.
- “발라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록 음악을 좋아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기타리스트를 꿈꿨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이문세 선배님의 노래 ‘소녀’를 듣게 됐어요. 그런 음악이 좋더라고요. 록도 좋아했지만 발라드곡도 좋았는데 특히 돌아가신 작곡가 고 이영훈 씨의 곡이 좋았어요. 그런 정서를 가지고 있다가 그룹 ‘공중전화’의 음반을 만들게 됐고, 자작곡이 필요해서 곡을 써보게 된 겁니다. 남들 곡만 연주하다가 ‘사랑이 그리운 날들에’를 썼습니다. 창작곡으로는 그게 첫 작품이었어요. 그 곡 역시 발라드였는데 주변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전까지 기타리스트로만 활동하다가 ‘곡도 잘 쓴다’는 칭찬을 받으니 붕 떠오른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눈물로 시를 써도’가 히트를 했어요. 작곡가로서 제 명성은 이승환 씨에게 곡을 주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셈이에요. ‘내사랑 내곁에’도 이때 쓴 곡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작곡에 집중하게 된 거지요. 세션도 꾸준히 했습니다. 이문세 씨 투어에서는 이영훈 씨가 건반을 맡고, 내가 기타를 맡아 투어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었다. 이문세, 이영훈, 이승환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생경한 이름의 가수들이 돼버렸다. 이제는 가요계 전반을 K팝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댄스곡들이 접수하고 있다. 이 같은 세태에 그도 피해 의식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 당시에는 곡에 정서가 있었고, 노랫말도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이돌을 필두로 반복되는 가사와 반복되는 멜로디, 더불어 현란한 몸짓이 가미된 댄스곡이 가요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 트렌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저는 모든 게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 상황은 모르겠으나 외국 영향을 받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록이 유행했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는 댄스곡이 대세이고 주류일 뿐이지요. 가요시장이 커졌지만, 언제, 어떤 음악으로 시장이 재편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한쪽으로 쏠림은 문제지만 저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록을 할 때도 그랬어요. ‘이게 무슨 음악이냐고.’ 하지만 저는 그 안에서도 그 음악 나름의 철학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걸 존중해야 합니다. 그건 기획자가 판단할 몫입니다.”
- 포털에서 ‘오태호’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작곡가, 가수, 수필가로 나옵니다. 글을 많이 쓰는 편입니까.
- “많이 쓰지는 않습니다. 그저 생활 속에서 메모를 많이 합니다. 대화 중에도 공감 가는 부분이 있으면 녹음을 하지요. 그런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책을 쓴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동안 기타교재나 작곡교재를 써달라는 제의를 받은 적은 있는데 거절했습니다. 학교강의 제의도 받았고요. 그런데 내가 아는 게 얼마 안 돼서 2~3일 하면 다 드러날 것 같더군요. 그래서 거절했어요. 책 이야기는 이번에 펴낸 수필집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메모가 많이 쌓여서 쓰게 된 겁니다. 수첩에도, 휴대폰에도, 컴퓨터에도 메모가 쌓여있습니다.”
- 제 생각으로는 글이나 음악적 재능, 모두 자라날 때 환경과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오태호 씨가 음악과 친숙해진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중학교에 다닐 때 우리나라 기타의 대부 신중현 선생님의 아들인 신윤철 씨가 같은 반이었어요. 둘이 친하게 지냈지요. 같이 어울리면서 록이나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들었습니다. 나는 원래 조용필 선배님의 노래를 주로 들었었는데, 그 친구와 어울리면서 다양한 음악을 접하게 됐습니다. 그룹 H₂0의 박현준도 마침 같은 반이었어요. 세 명이 함께 어울리다 보니 음악과 친숙해진 거지요. 기타도 그렇게 치게 됐고요. 제 주변에는 항상 음악이 있었어요. 글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글을 많이 썼다거나 책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노래 가사를 쓰려고 하다 보니 글을 쓰게 된 거지요. 글은 내 안에 가지고 있던 성향인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 음악적 영감이 떠오를 때 곡을 만드는 편입니까. 아니면 곡을 쓰기 위해 애를 쓰는 편입니까.
- “90%는 일단 자리에 앉아서 애를 쓰는 편입니다. 악상이 저절로 떠오를 때는 10% 정도나 될까요? 흥얼거리거나 기타를 잡고 연주를 하면서 머리를 짜내는 편이지요. 어떤 때는 쥐어짜내도 안 되는데, 어떤 때는 술술 풀리기도 해요, 나는 의뢰를 받으면 그때부터 앉아서 머리를 쥐어짜는 편입니다. 악상은 자기 전에 많이 떠오릅니다. 그럴 때마다 일어나서 스마트폰에 녹음해놓지요.”
그는 90년대 이승환과 함께 듀엣을 결성해 주가를 올리기도 했던 인기 가수였다. 지금도 인터넷을 뒤지면 앳된 얼굴의 두 청년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이승환 씨와 듀오 ‘이오공감’ 활동을 하면서 무대에 오를 때에 비해 활동이 뜸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 “연주활동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EBS의 ‘스페이스 공감’에서도 최근에 녹화했어요. 기타리스트로 내 모습을 다시 보여주게 돼서 기뻤습니다. ‘내사랑 내곁에’를 편곡해서 맨 끝에 연주했지요. 이범학 씨도 나오고, 나는 기타를 연주하면서 진행하고, 사회를 봤습니다. 객석의 반응이 좋았어요. 내 이름을 걸고 공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소규모 공연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번에 펴낸 책에도 부록으로 CD가 들어있습니다. 작곡가로서 내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고 싶습니다.”
- 자신의 재능을 선천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후천적이라고 생각합니까.
- “글재주는 선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준비과정이 없었으니까요. 작사할 때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옮겨 적은 것뿐입니다. 노랫말은 일반적으로 사랑과 연관된 게 많은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음악이나 기타는 노력 끝에 얻은 재능입니다. 대부분 싱어송라이터가 작사와 작곡을 병행합니다. 저도 그런 부류로 보시면 됩니다.”
그는 90년대 노래를 만드는 작업에 관한 한 강호(江湖)를 평정한 것으로 보였다. 그 같은 생각은 그가 수상한 실적에 기인한다.
- 당신은 1994년 뮤직박스 최우수 작곡가상, 1993년 뮤직박스 최우수 작사가상, 1992년 대한민국 음반가요대상을 받았습니다. 오태호 씨가 만들어서 히트했던 곡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요즘도 가수들로부터 곡 의뢰는 여전할 것 같은데 경제적으로는 살 만합니까.
- “네. 저작권료 수입이 있어서 힘들지는 않습니다. 영화, 드라마, 인터넷 등 음악을 쓰는 매체들이 많아진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노래방도 생기고 인터넷 스트리밍 등이 생기니 수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과분하고, 고마운 대우라고 생각합니다. 2년 전에는 내가 만든 곡으로만 제작한 뮤지컬 ‘내사랑 내곁에’를 한전아트센터에서 공연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살아생전에 그런 호사를 누리다니…”
그는 오로지 필마단기(匹馬單騎)로 곡을 쓰고, 노랫말 만들고, 기타치고, 노래까지 부르던 싱어송라이터였다. 외국인 작곡가들로 풀(Pool)을 갖추고, 전문 작사자들로부터 노랫말을 사들여 공산품처럼 노래를 찍어 내는 대형 기획사들과는 다른 시대의 사람이었다.
- 대형 기획사들이 출현하면서 대중음악이 상업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저는 음악의 예술성보다는 공감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음악은 타인이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나도 만족하고, 타인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음악을 만드는 게 내 목적입니다. 내가 만족하는 곡들 대부분은 대중들도 만족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내가 부끄러운 곡을 만들었을 때 대중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최선을 추구하다 보니 결과가 좋았던 것이지요. 저는 대중음악은 상업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가요에 대중이라는 의미는 그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술이라는 찬사보다는 가사가 좋고, 곡이 좋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대중가요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가수다. 작곡가도 있고, 세션도 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은 가수다. 그도 한때 인기를 얻은 가수였다. 가수로 무대에 서고 싶은 미련이 남아있지는 않은지 궁금했다.
-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미련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 “노래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타리스트로서 가수들과 같이 호흡하고는 싶습니다. 가수로 활동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습니다. 다만 음악을 계속 만들고 있는 만큼 감각은 유지해 나갈 생각입니다.”
- 가수와 작곡가 중 어떤 일에 더 애착이 갑니까.
- “가수로서는 앨범을 냈을 뿐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스스로 생각해도 작곡가로서의 재능에 비해 노래 실력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남들 앞에 나서 활동을 할 실력은 아니지요. 가수라기보다는 작곡가로서 활동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작곡에 대한 애착이 큰 편이에요. 창작에 대한 욕구가 강합니다.”
작곡가 오태호의 가슴에는 평생 떼어 놓을 수 없는 훈장이 하나 붙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갈 명함이자 군번줄일 것이다. 그 명함은 바로 그가 작곡하고, 가수 김현식이 유명을 달리하기 전 노래해서 음반을 취입했던 명곡 ‘내사랑 내곁에’다.
- 오태호 씨를 인터뷰하면서 김현식 씨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만든 김현식 씨의 히트곡 ‘내사랑 내곁에’는 90년대 최고의 히트곡으로 꼽힙니다. 그 노래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만들게 됐습니까. 애초부터 김현식을 염두에 두고 만든 노래입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90년대에 신촌블루스 엄인호 선배와 밴드에서 함께 활동했었습니다. 현식이 형은 신촌블루스가 전국 투어를 할 때 객원가수로 함께 했기 때문에 자주 어울렸지요. ‘내사랑 내곁에’는 그때 만든 습작 곡 중의 하나였어요. 어느 날 무대에 오르기 전에 대기실에서 그 곡을 흥얼거리고 있는데 현식이 형이 그게 누구 곡이냐고 물었어요. ‘내가 쓴 곡’이라고 하자 대뜸 ‘나에게 달라’고 하더군요. 그 날 공연 끝나고 악보와 녹음테이프를 줬지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음반이 나왔는데 ‘내사랑 내곁에’는 빠져 있었어요. 아쉬웠지요. 그 앨범이 ‘내사랑 내곁에’가 들어 있던 유작 앨범 ‘넋두리’의 바로 전 앨범이었어요.
- 그리고 나선 저는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유작 앨범이 나오고 ‘내사랑 내곁에’가 전대미문의 히트를 했어요. 유작앨범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내사랑 내곁에’의 바람은 금방 사그라질 것으로 생각했어요. ‘가수가 죽었는데 노래가 히트하면 얼마나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정말 안타깝게 됐다’며 저를 위로 했어요. 그러다 ‘내사랑 내곁에’가 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했어요. 어쨌거나 현식이 형은 저에게는 제일 고마운 사람이에요. 작곡가 오태호를 알려지게 했으니까요. 아직도 그 노래가 김현식 작사·작곡인 줄 아는 사람도 많긴 하지만요.”
- ‘내사랑 내곁에’로 돈을 많이 벌었겠습니다.
- “네. 그 노래 한 곡이 내 수입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 곡 말고도 내 곡이 ‘가요톱10’에 6~7곡까지 한꺼번에 오른 적도 있어요. 최근에 방영된 케이블TV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도 내 곡이 10개 정도 리메이크돼서 나왔어요. 그 덕도 많이 봤지요.”
그가 곡을 쓰면 대부분 히트한다. 그 창의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의 재주가 부러웠다. 그리고 그 재능을 쏟아내는 감수성의 원천이 궁금했다.
- 당신의 감수성은 언제 형성된 겁니까.
- “아마도 고등학교 때일 겁니다. 그 시절 친구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들은 인터넷 밴드를 만들어서 석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나고 있습니다. 정을 많이 주고받은 친구들입니다. 요즘 문제 되는 왕따도 없었고, 서로를 위해주고, 배려해 주면서 성장했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해질 수 있는 토양이었어요.”
- 앞으로 어떤 뮤지션과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까.
- “조용필 선배님과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조용필 선배님이 세션 부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얼굴 알려지는 게 싫었고, 또 다른 사정이 있어서 응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부탁이 영광스럽기는 했지요. 그래서 이제 사과하는 의미로 그분에게 곡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임재범, 이승철 씨에게도 기회가 되면 곡을 드리고 싶어요. 임재범 선배님은 잘 아는 사이이긴 하지만 20년 전에 친했다가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어요. 한동안 격조하다 다시 전화하긴 쑥스럽더라고요.”
- 오태호
- 작곡가, 수필가 / 1968년 6월 23일생
- 1994년 뮤직박스 최우수 작곡가상 / 1993년 뮤직박스 최우수 작사가상 / 1992 대한민국 음반가요대상 /1987 그룹 ‘공중전화’ 멤버
- 대표곡 : 기다린 날도 지워진 날도 / 사랑과 우정사이 / 이별 아닌 이별 / 내사랑 내곁에
오태호가 책을 쓴 사연
오태호를 취재하려고 결심을 한 이유는 그가 책을 냈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검색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은 ‘비 갠 아침 바람의 향기’. 그동안 그가 만들었던 곡들만큼이나 서정적인 제목이다.
‘가사로 못다 한 오태호의 지나간 낙서 같은 이야기’란 부제가 붙은 책에는 그가 일상에서 느낀 감상과 기록 100여 편이 실렸다.
기자가 읽은 그 책에서 오태호는 “노랫말을 쓸 때 도움이 될까 해서 10여 년 전부터 메모지나 핸드폰 등에 수시로 기록해 두었던 낙서 같은 글”이라고 설명했다.
아닌 게 아니라 책에는 오태호가 느낀 소소한 일상과 생각들이 기록돼 있다. 또 책의 끝장에는 도넛보다 작은 CD도 한 장 부록으로 붙어 있다. CD에는 이승환·오태호가 22년 만에 함께 부른 ‘추억 속에서 만나요’와 최승호가 피처링(featuring)을 한 ‘비 갠 아침 바람의 향’이 수록돼 있다.
오태호는 이 곡들에 대해 “앞으로 Mayflower란 프로젝트그룹으로 꾸준히 발표할 음원의 첫 작품”이라며 “30~40대 청장년들이 편안히 들을 수 있는 음악을 꾸준히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히트곡을 작곡해 가수들에게 헌정해 온 노력의 연장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