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9
사후 10년, 백남준에 대한 회고
사후 10년,
백남준에 대한 회고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백남준아트센터
나도 중3 때까지 미대를 지망했었다. 나는 미술대회만 나가면 상을 타가지고 돌아왔다. 미술 선생님께서도 “너는 꼭 미대에 가야한다”고 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이 재미있었다. “온종일 그림만 그리고 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미대 진학을 반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대 가면 춥고, 배고프다. 너를 미대에 보낼 수는 없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내 고집은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게 됐다. 글을 쓰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따금 ‘내가 미대로 진학했으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런데 관광공사에서 “이달에는 백남준에 대해 기사를 써 달라”고 했다.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한숨이 나왔다. 가슴이 뛴 것은 미술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고, 한숨이 나온 것은 수십 년의 세월을 앞서 간 천재의 내면을 어떻게 취재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는 아티스트였지만 그림을 그리는 대신 TV를 쌓아 올려 영상으로 자신의 생각을 관객들에게 보여줬다. 그의 미술세계는 일반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취재에 나서기 전에 날라리 신자인 내 입에서 절로 기도가 나왔다. “하느님 내가 백남준을 잘 이해하게 해주시고, 기사가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어렵게 시작한 취재였지만 그나마 백남준 제자들의 말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백남준 작품의 설치를 담당했던 독일인 테크니션 요헨 자우에라커(Jochen Saueracker)는 “안타깝지만 백남준의 작품들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건 다음 세대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함께 작업했던 동료의 이런 멘트는 단비와도 같은 위안이었다.
백남준, 최초의 휴대용 TV, 1973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의 설치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 김용도의 멘트도 큰 힘이 됐다.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 TV를 붙여서 미디어 작품을 만드는 게 본인에게는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생각에는 ‘이렇게 갖다 붙여볼까? 저렇게 붙여볼까?’ 하면서 쉽게 만들어낸 건데 보는 사람들이 놀라워하니까 마치 사기를 치는 꼴일 수 있다는 거다. 그가 바로 천재라는 증거다.”
그렇다고 해서 백남준의 시도를 이해하지 못해도 되는 것처럼 그의 정신세계를 외면할 생각은 없다. 그의 천재성을 인식하고,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이 글의 당면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인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를 찾아갔다. 서진석 관장에게 백남준의 작품세계를 물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60~70년대 작품에서 이미 다양성과 전(全)지구성, 융합성 등 디지털사회 키워드를 선도적으로 예시했다. 또 그의 작품들은 장르나 지역, 문화, 양(洋)의 동서를 뛰어넘어 다양성을 보장했다. 그는 수평적이고,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세계화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글로컬리즘(glocalism)을 얘기했다. 철학의 경우 동서양 간에는 학문의 우열이 없다. 철학자들은 동서양의 학문을 서로 이입하면서 해석하려고 했다. 예술가 중에서는 백남준이 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유토피아적으로 바라보았다. 인간과 사물을 아우르는 예술이 고전 역학(力學)의 장르라고 한다면 미디어아트는 원자, 분자, 소립자 등의 미시적 대상에 적용되는 양자(量子)역학의 차원이다. 초창기 작업에서 그런 예는 많이 볼 수 있다. 그는 ‘정주 유목민’ ‘전자고속도로’는 물론,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1인 미디어 시대를 외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백남준의 뉴욕 스튜디오를 재현한 ‘메모라빌리아(Memorabilia)’. 백남준아트센터 상설 전시 공간이다
이미 60년대에 ‘바이 바이 키플링’부터 ‘손에 손잡고’까지 냉전 이후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서로 상생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이다. 사상과 철학도 한계를 느꼈던 수평적인 교류를 예술사 안에서 유일하게 시도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서진석 관장의 얘기는 비디오아트의 소리와 모습, 공감각적인 통섭, 예술과 기술의 접합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의 얘기를 듣고 보니 ‘정주유목민’은 네티즌, ‘전자고속도로’는 인터넷, 1인 미디어는 파워블로거나 팟캐스트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내 가정이 맞는다면 백남준은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 간 선지자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의 설명은 보다 구체적이다.
“미술이 아름다움의 표현이나 장식의 영역을 벗어난 지는 오래됐다. 벽에 거는 페인팅만이 미술이 아니다. 백남준의 세계는 확장된 미술의 개념으로 바라봐야 한다. 백남준은 생활 속의 오브제(객체)를 끌어들여 영역을 확장했다. 일상의 물건을 들여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것이다. TV를 사용해서 예술을 한 백남준을 기존의 눈으로 봐서는 안 된다. 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줬다는 측면에서 봐야 한다. 미술이라면 정적인 오브제로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데 백남준의 작품은 영상작품이라 이미지가 움직인다. 게다가 사람들은 백남준의 작품에 시간의 흐름이 포함돼있다는 것을 낯설어한다. 백남준은 자신의 작품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추가해 예술의 차원을 끌어 올렸다. 일상성이 수용된 새로운 장르의 미술인 셈이다. 우리는 그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작품을 일방적으로 보아 왔는데 그의 영상작품에서는 영상이 움직이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움직이면서 상호 반응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작품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이 활성화되면서 기억을 일깨우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백남준, 로봇 오페라, 1964
작품의 영상을 보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 전’을 본 것이고, ‘잠시 후’ 작품을 보는 방식이 우리의 지각 능력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다. 그런 현상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그림이나 조각만이 미술의 장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가 백남준을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 까닭은 이 낯선 담론이 컴퓨터 세대에게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점 때문이다. 재래식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이들이 백남준을 의아해하고, 어려워하는 이유다.
또 김 관장은 “우리는 백남준의 작품을 볼 때 그 같은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며 “그의 위대함은 예술의 개념을 확장시키고, 보는 태도를 변화시켰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백남준이 선지자로 평가받는 이유다.
실제로 평론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백남준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말했다.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지각 능력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60년대 TV가 처음 나왔을 때 화면을 통해 1분에 10개의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이제는 100개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 그만큼 인간의 지각 능력이 고양됐다고 보는 것이다.
백남준, 위성나무, 1992
김홍희 관장은 의미 있는 작품 전시를 두 차례 기획한 ‘백남준 전문가’다.
첫 번째는 2007년 스페인 아르코 아트페어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했을 때다. 여러 갤러리 전시를 비롯, 기획전들이 있었는데 백남준의 작품들이 특별전으로 전시됐다.
이때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한국에서 가지고 나간 작품들이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백남준의 작품은 유럽에도 많았기 때문이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유럽인들은 이미 지역 내의 작품들은 섭렵했기 때문에 국내 작품들을 반출해 전시했다. 국내 기업, 개인들의 소장품들을 빌려서 가지고 나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하나는 2007년 KBS 주최로 열린 ‘백남준 광시곡’이었다. 뉴욕에 있는 소장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백남준의 후기 멀티모니터들을 망라했다. 당시 작품들은 만년인 90년대 이후 작품들 위주였다.
백남준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탈(脫) 물질적인 미디어아트를 창안했다는 점을 평가받는다. 그의 위대함은 그림이라는 2차원적인 평면예술, 혹은 조소라는 3차원 공간예술에 시간을 더해, 4차원의 예술 장르를 개척했다는 데 있다.
다음은 백남준의 위대함에 관한 서진석 관장의 생각이다.
“백남준은 예술의 개념을 변화시킨 장본인이다. 예술의 고정관념을 깨부순 선구자였다. 남들이 상상하지 못한 것, 또는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먼저 보고 행하는 것을 전위라고 한다면 백남준은 그에 관한 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얼마간에 한 번씩 새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죽은 작가’라고 말했다. 전자산업의 가능성을 예견한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백남준은 정보에 뛰어난 작가였다. 쉽게 말하면 그의 정보채집 능력이 비디오아트를 만들어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는 미디어아트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많은 예술가들이 영향을 받았다. 그 시대 작가들 중에서 백남준만큼 국내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이는 없다. 일단 그의
미술사적 후광 자체가 한국 미술에는 엄청난 도움이자 지원이다. 사조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적 분야까지 종합해보면 그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백남준 사후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걸었던 플럭서스(변화, 움직임을 의미하는 전위예술운동)는 로코코나 바로크, 팝아트처럼 시대를 풍미한 정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직 많은 작가들이 플럭서스 정신을 이어받아 활동하고 있는 이유다.
백남준 추모 10주기 특별전 전시작 ‘단조로운 직선의 소리’, 2016
취재를 마무리하면서 기자는 이 두 전문가에게 ‘어떻게 해야 백남준을 잘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 보았다.
김홍희 관장은 “백남준의 메시지는 고정된 사고방식을 벗어나 시도하는 실험인 만큼 사람들과 소통을 원한다”며 “사람들이 TV나 비디오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도구로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관객들 역시 엘리트부터 문외한까지 소통을 원하지만 수용에는 시간이 걸리고,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작가들이 비행기를 타고 갈 때 관객들은 버스를 타고 가는 상황이라 시차 극복이 필요한데, 앞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작품을 통해서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진석 관장의 생각도 비슷하다. 서 관장은 “현대미술을 접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는 작업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과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며 “아울러 열린 마음으로 편하게 바라보면서 어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작품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관객들은 참을성이 없다”며 “작가의 작업에 어떤 히스토리가 있는지 공부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살펴본다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오래전 청사초롱에 인터뷰했던 가수 장사익 선생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98년 6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미 중인 김대중 대통령 내외를 위해 베푼 백악관 국빈만찬장에서 일어났던 일은 백남준의 퍼포먼스예유!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입장한 백남준이 클린턴 대통령과 김 대통령 내외 앞에서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을 때 바지가 흘러내린 것 알고 있쥬? 속옷을 안 입고 있었잖유. 그게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을 풍자한 거라니께.”
곰곰이 생각해보니 장사익 선생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백남준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작업을 했던 것일까….
백남준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섬유업자인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울과 홍콩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냈고, 일본 가마쿠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미술사와 미학, 음악학, 작곡을 공부했으며,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음악으로 졸업 논문을 썼다.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와 프라이부르크 음악학교, 쾰른대학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했다.
56년 독일로 건너간 백남준은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이듬해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데뷔작인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Homage a John Cage)’를 초연하면서 공연 중에 바이올린을 부숴 주목을 받았다.
64년 미국으로 이주,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이용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80년부터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필두로 위성기술을 이용한 텔레비전 생방송을 통해 전위 예술과 대중문화의 벽을 허무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며, 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독일관 대표로 참가해 ‘유목민인 예술가’라는 주제의 작업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90년대 중반부터 뇌졸중을 앓았음에도 2006년 타계할 때까지 예술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취재에 도움을 주신 분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캐나다 콩고디아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고,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페미니즘·비디오·미술’(1998), ‘굿모닝 미스터 백’(2007)외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경기도미술관 관장 ▲쌈지스페이스 관장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커미셔너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백남준에 관한 한 국내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9년 한국미술계 최초의 대안공간인 루프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많은 젊은 작가들을 발굴, 지원해왔다. 다양한 국제 활동을 통해 아시아 미술인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2004년부터 160여 명의 아시아 작가들과 전 세계 순회전시를 하고 있다. 또 세계 유수의 미디어아트 기관들과 함께 21세기 미디어아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미지와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