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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스토리


발행호 474 호

2016.11.03

한복디자이너 이효재

이효재 소품(좌:보자기로 만든 가방, 우)흰천으로 만든 다기수납함과 다기받침대)

 

한복디자이너 이효재

 

한복디자이너로 시작해 보자기 아티스트까지, 이효재를 꾸미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마당 가득 자연을 들여놓은 성북동 집에서 그녀를 만났다.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사진 우현석, 문덕관

 

 

‘이효재’라는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공부를 하고 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20년 전 평기자 시절, 패션 담당 기자 대신 패션쇼 취재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디자이너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고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레강스한 스타일로 시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때의 악몽을 극복하려고 인터넷에서 ‘이효재’라는 이름을 뒤졌다. 그가 한복디자이너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그 어려운(?) 전문 용어를 들으면서 기사를 고쳐 쓰는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에 관한 기사와 자료는 적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글이 추상적이었다.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고 가도 어려운 게 인터뷰인데,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인가. 닥치는 대로 자료를 긁어모아 통독을 한 후에 카메라와 노트북을 들고 성북동에 위치한 그녀의 가게 ‘효재’로 향했다.

성북동 길상사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효재’는 그녀의 집과 붙어 있는 가게다.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더니 점원이 그와 통화한 후 나를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이효재 선생은 집안일을 하고 있었는지 수수한 옷차림으로 기자를 맞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옷이 바로 그녀가 개발한 항아리치마였다.

 

빨간색 항아리치마를 입고 바구니를 들고 있는 이효재

 

 

한복디자이너로 알려졌지만 한식 메뉴 개발, 보자기 제작 등 많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본업이 무엇입니까.

어머니가 하는 한복집을 물려받아 한복을 만들고 있었으니 한복디자이너라고 해야지요. 그 일을 행복하게 하고 있어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의식주 생활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중에서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입는 의생활에 관한 거지요. 그런데 요즘 한복은 혼수, 예단을 준비할 때나 구경할 수 있는 옷이 됐어요. 결혼 때 숙제처럼 입는 민속 의상이 돼버린 거죠. 저는 58년 개띠에요. 어린 시절 장에 나가면 양장을 한 사람들보다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우리 세대에게는 그렇게 친숙한 한복이 지금은 아련하게 다가와요. 나이 예순이 코앞으로 닥치니 더 절실하게 느껴져요. 예전에는 한복이 늘상 입던 옷이니까 짓기 전에 치수만 재면 됐어요. 그런데 요즘은 안 입던 사람이 한복을 맞추니까 상담 시간이 길어져요. 손님이 11시에 오면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게 돼요.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고, 국수를 먹고 그러죠. 식사가 부실하니까 손님께 후식을 잘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 작은 정성에 손님들이 감동을 하세요. 그럴 때마다 ‘삶이라는 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하찮은 짜장면, 국수에도 감동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요. 그렇게 손님들과 식사를 하다 보니 ‘저 집 음식은 뭐가 맛있더라’ 하는 소문이 났어요. 그런 게 쌓여서 입을 거리와 먹거리에 관해 쓴 《효재처럼》이라는 책을 내게 됐지요. 의식주를 포함한 여러 내용을 담은 책인데 10만부가 나갔어요. 책을 냈더니 방송 요청도 들어오고…. 최근에는 제천시 약채락 행사에 홍보대사를 맡았어요. 사람들은 의식주를 나눠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것들은 함께 묶어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의식주를 한데 묶어서 생각해야 한다고 얘기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저를 문화디자이너라고 부르기도 해요. 나이 드신 분들은 우리 집을 2대째 혼수 한복집을 하는 집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이 보자기아티스트나 문화디자이너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번잡하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내 나이 쉰아홉이에요. 이제 예순을 바라보게 되니 시끄러운 삶은 그만 접고, 침잠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예순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나를 디자인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봄날 들판이 아닌 울긋불긋한 가을 산, 장중한 가을 산으로 소풍 가는 기분이에요.

 

 

말은 깍듯이 경어를 쓰는데 대하는 태도는 마치 십 년은 알아온 사람처럼 스스럼없다. 기자생활 25년 하면서 정치가, 기업인을 망라해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렇게 사교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효재 소품(아주 작은 도자기 화병이 여러 개 있고 그 안에 작은 꽃이 하나씩 꽂혀있다)

이효재 소품(낙엽을 물로 닦아 말려 하나씩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회색빛 도자기 잔을 여러개 올려놓았다)

길가의 돌멩이, 낙엽, 나뭇가지도 그녀의 손을 거치면 아름다운 살림살이로 재탄생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한복 짓기’였어요. 지금도 변함없이 하고 있지만요. 한복집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한복을 대하는 자세가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다른 한복디자이너들은 한복을 진정 사랑해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저에게는 한복이 그냥 삶이었어요. 어려서부터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저 쉽고, 편하고, 잘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이따금 사람들에게 나는 한복이 지겹다고 말할 때도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한복집에서 태어난 업보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한복집에서 태어난 것, 아버지 딸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도 서울로 오는 기차역에 서 있자니 ‘나이 든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성분들은 선생님께서 만드는 조각보 같은 소품에도 열광하는 것 같습니다.

한복집 딸로 태어나서 봄가을 혼수 때 만든 천 조각 남은 거로 조각 이불이나 베갯잇을 만들고 조각보도 만들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기자 등 뒤편에 있는 실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건 실타래가 풀리지 않도록 만든 실꾸리 꼭지에요. 단추도 못 만드는 자투리 헝겊으로 만든 거지요. 나는 일부러 저걸 안 배웠어요. 저걸 배우면 어머니가 마음을 놓고 돌아갈 것 같았거든요. 제 심정… 제 말씀 이해하시겠지요?

(잠깐 말을 끊은 그녀의 얼굴 위로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저걸 볼 때마다 가위를 어디에 댈지 고민하셨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요. 집에 바구니가 많은데도 어머니는 바구니를 기워 쓰셨어요. 그때는 궁상맞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머니 나이가 돼가고 있어요. 그런 게 오버랩 되면서 ‘내 얼굴 주름은 훈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무 책장 사이에 실꾸리 꼭지 여러개가 꽂혀있다

실타래가 풀리지 않도록 자투리 헝겊으로 만든 실꾸리 꼭지

 

반짇고리와 바느질 도구들

반짇고리와 바느질 도구들

 

 

서울과 제천을 오가며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제천에 살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제천에서 1년 살았어요. 제천에서 5일을 보내고 서울에서 이틀을 보내는 오촌이도(五村二都) 생활을 하고 있어요. 탈(脫)서울 하고 싶었거든요. 이외수 선생처럼 산속으로 들어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리솜리조트에서 광고 모델 제의가 들어왔어요. 나중에 들었더니 홍보회사 직원이 모델을 쓰지 말고 상황 설정에 맞는 실제 인물인 이효재를 쓰자고 했데요. 촬영을 하러 갔더니 리조트 안에 구절초가 하얗게 피었는데 그 주변에 다 무너져가는 건물이 있었어요. 그 건물을 80만원 들여서 고치고 거기에 살고 있어요. 제가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이제는 그곳도 자유롭지 못해요. 제천 사람들은 저를 고향 떠난 시누이처럼 살갑게 대해 주고 있어요. 리솜리조트 안에 숍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곳에서는 돈을 벌지 않기로 했어요. 이윤을 남기지 않고 직원 한 사람 뽑아서 일자리를 주겠다는 생각으로 하는 거예요.

 

백화점에도 매장을 운영하고 있지요.

롯데에 매장이 2개 있어요. 수익금은 가난한 아시아 어린이들을 돕고, 태양광 전등을 달아주는 데 전액 사용하고 있어요. 강의료 받는 돈으로 교통비 정도만 사용하고 있어요.

 

항아리 뚜껑에 낙엽을 모아 담고 있는 이효재

잔디 밭 위에 7명의 방석을 깔고 술병과 술잔을 올려놓았다

이효재의 자연주의 살림법

 

 

그동안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 중 가장 보람된 것을 꼽아주세요.

어린이를 돕는 것과 우리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일이에요. 아시아 어린이를 돕는 일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고 있고요. 보자기나 한복을 만들어 해외에 알리는 일도 하고 있어요. 보자기는 한때 궁상맞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하지만 슈퍼맨이 목에 걸고 날아가는 게 보자기잖아요. 요즘 화두가 환경 문제인데 외국인들이 보자기에 관심이 많아요. 한복은 외국에서 강의가 있을 때면 준비해 가요. 한복을 나눠주는 거로 입는 문제를 해결해주죠. 외국 사람들 눈에는 아시아 사람들의 옷이 비슷해 보이는지 한복을 잘 구분하지 못해요. 우리 먹거리를 알리는 일도 하고 있어요. 외국에 나가면 믹서에 쌀을 갈아서 송편을 만들어주곤 해요. 한 번은 한 외국인이 한식당에 데려가겠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일식당이더라고요. 보자기 판매 수익금으로 아시아 아이들에게 끼니도 제공하고 있어요. 인도 사람들에게 전기를 놔주는 일도 하고 있고요. 인도 아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컴퓨터를 켜고 아이들의 얼굴을 자꾸 쳐다보지요.

 

강의료로 생활한다고 하셨는데 주로 어떤 내용을 강의하십니까.

한복이나 보자기, 또 진정한 아름다움이 뭔지에 대해 강의하고 있어요. 한복이나 보자기를 들고 다니면서 강의할 때 보람을 느껴요. 어제는 장흥 보림사에 갔었는데, 부엌에서 강의를 하고 왔어요. 보살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 주길래 부엌에서 즉흥적으로 보자기 싸는 법을 알려주었지요. 이게 그때 받아 온 비자에요.

(그녀는 기자에게 자꾸 비자를 먹어보라고 권했다.)

얼마 전에는 강릉 선교장에서 평창동계올림픽 500일을 앞두고 ‘명인전’을 했는데 제가 음식을 준비해 갔어요. 선교장의 현판 ‘선교유거(仙嶠幽居)’를 쓴 분이 증조부거든요. 그래서 비가 내리는데도 갔어요. 서울서 강릉 갔다가, 제천으로 해서 부산까지 다녀왔어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다양한 색깔의 보자기로 물건을 포장해 놓았다

다양한 색깔의 보자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매듭대신 고무줄로 묶은 보자기를 앞에 두고 환하게 웃고 있는 이효재

매듭대신 고무줄로 묶은 보자기

 

 

 

고향은 어디입니까.

충청도에요. 아버지가 결핵이 있어서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요양을 했는데 그곳에서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글만 읽는 선비’였어요.

 

‘이효재와 함께하는 약채락 페스티벌’을 진행하는 등 제천의 약선요리인 ‘약채락’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컨설팅 했습니까.

컨설팅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분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제천에 살았기 때문에 저를 고향 까마귀처럼 좋아하지요. 내년에도 홍보대사를 해달라고 했어요. 제천분들은 저를 끼고돌고 아껴주세요.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 은혜를 갚으려고 열심히는 하지요.

 

 

약선이란 약(藥)과 선(膳: 반찬)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한의학 이론에 근거, 생약이나 약용 가치가 높은 식품을 잘 배합해 조리한 영양식을 말한다. 민간에서부터 궁중에 이르기까지 천연 한약초와 식품을 배합한 약선의 묘방, 처방이 전해 내려온 것은 이 때문이다.

 

 

약선요리에는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습니까.

약선요리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고, 우리 음식은 이미 약선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제천이 교통의 요지인 데다 약재가 풍부한 특징을 살려서 약선요리라는 마케팅을 시도한 거지요. 지금 드시는 비자도 약선음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면 이게 구충제였거든요.

 

사과밭에서 사과를 한아름 들고 나오는 이효재

 

 

그의 남편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이다. 그는 국악의 선율을 입힌 연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음악가다.

 

 

남편이 피아니스트 임동창 씨인데, 부부의 작업이 신토불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습니까.

우리 부부는 서로 바쁘다 보니 집 나오면 서로 남처럼 지내요. 어제 남편이 보림사에서 공연을 했는데 모처럼 부부가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공연 끝에 관객들에게 보자기 퍼포먼스를 해주고 왔어요. 남편 공연을 도와준 것은 처음이었지요. 누가 ‘임 선생 어디 계세요?’라고 물으면 ‘어딨는지 모른다’고 대답할 정도로 서로 바쁘게 살아요. 하지만 우리 남편이 어디선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요. 그래도 우리 부부는 서로 신뢰가 쌓여 있지요. 우리 남편은 남을 받쳐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요. 어제도 관객들이 모두 떠나갈 때까지 피아노를 쳐주더라고요. 우리 남편 감기 걸리지 않게 공연 많은 10월에는 비 좀 내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여러 개의 채반 앞에 앉아 있는 이효재

 

관광은 이제 지자체들이 올리고 있는 수익원 중 가장 큰 부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업은 관광에 스토리를 입히는 좋은 콘텐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작업을 시도하기도 합니까.

성북동은 대사관이 많은 데다 부자 동네라는 인식이 있지요. 저의 산책길 코스는 유명한 돈가스집부터 시작돼요. 근처 음식점에서 술과 음식을 사서 산책을 하지요. 그때가 참 행복해요. 나만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순간이거든요. 정자에 또는 성벽 돌에 앉아서 준비한 음식을 먹기도 해요. 600년 전에 이 돌을 쌓았을 것을 생각하면, 요즘 팽배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야경을 보면서 와룡공원까지 올라가 좁은 길을 걸어서 쌍다리 기사식당까지 걷기도 해요. 그런데 아세요? 성북동은 앞길만 번화하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가난한 집들이 많아요. 그래서 독거노인 돕는 일도 하고 있는데, 방 한 칸에 여섯 분씩 모여 사는 집도 있지요. 그렇게 봉사를 하다가 친한 친구들이 놀러 오면 운동화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같이 길을 걷기도 해요. 다람쥐처럼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재미로 돌아다니죠. 우물터를 찾아보고, 미나리를 캐고,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녀요. 늦은 밤에 북악스카이웨이에 가서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고 오기도 하고…. 저는 컴맹이라 요즘 젊은 사람들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지만, 집회로 인해 차가 막힐 때나 일기예보를 못 봐서 비 맞을 때 빼고는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선생님이 좋아하는 성북구와 제천의 문화콘텐츠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좋은 콘텐츠가 많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들을 캐내 흙을 털어내야 하죠. 성북구는 성의 역사만으로도 엄청난 콘텐츠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것만 가지고 의식주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어요. 옷도, 음식도, 철학도 이야기할 수 있고 감동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나는 체증이 심한 고속도로를 타고 지방으로 갈 게 아니라 주말에는 서울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말에는 서울을 즐기고 휴가 때 지방을 즐겨보자는 게 제 생각이지요. 제천은 강남에서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잖아요. 제천 자랑을 해보라고 하시니까…. 제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정방사예요. 법주사 말사인데, ‘10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절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워요. 그곳에 가려면 10리를 빛을 안 보고 걸어야 해요. 청풍호가 한눈에 보이는데, 금강산 한쪽을 떼어낸 것 같은 느낌이지요. 그곳 스님은 재즈와 신학에 조예가 있는 분이에요. 제천의 아름다운 곳에 바늘 하나를 꽂으라면 정방사에 꽂고 싶어요. 벚꽃 길을 구경 갔다가 비를 맞으며 이끼 낀 정방사 10리 길을 걸은 적이 있어요. 여행길에 내리는 비는 축복이에요.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장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효재의 뒷모습

 

한복디자이너로서 한복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요즘 지구인들은 청바지만 입고 자라지요. (웃음) 하지만 저는 한복 세대예요. 요즘 아이들에게는 청바지가 일상복이며, 영어가 모국어지요. 세태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변하게 마련입니다만, 요즘 젊은이들이 입는 옷은 제가 입는 옷과는 달라요. 그나마 제가 잘한 일이 하나 있다면 유관순 언니가 입었던 항아리치마를 만들어 보급한 거지요. 활동성이 좋아서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거든요. 계단 많은 집에서는 넘어질 위험성이 있어서 한복을 입을 수 없지만 통치마는 상관없어요. 한복을 대중화시키려는 저의 노력은 여기까지예요. 나머지는 다음 세대들의 몫이지요. 그들의 심장에 큐피드의 화살이 꽂혀서 감동을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해요.

 

 

김영섭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 이야기로는 우리나라 민속용품 중 보자기만한 예술성을 가진 것이 없다고 하던데 직접 만드는 분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원래 조각보 제작은 자투리 헝겊을 아끼는 것에서 출발했어요. 보자기는 좋은 원단으로 만들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쓸모없던 조각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조화와 기능을 만들어내지요. 옛날에는 제 작업실이 중앙일보에서 가까웠어요. 그래서 중앙M&B에서 명절 때 거래처에 보내는 선물을 쌀 때마다 우리 집으로 보내기도 했어요.

 

무언가를 포장한 노란색 보자기

 

지금 계획 중인 작업이나 장래에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에 대해 생각해요. 열다섯 살 때부터 고민해온 숙제지요. 철학자에게 상담한 적도 있어요. 저에 대한 가장 큰 칭찬은 ‘너 이제 죽어도 될 것 같다’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요. 저는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자투리 시간을 아껴 쓰면서 최선을 다하는 건 후회 없이 죽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에요.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집 건너편에 있는 길상사로 가려는데, 그녀는 “아, 참. 깜빡할 뻔했네” 라면서 어디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을 신부님과 하기로 했는데 잊어먹을 뻔했다는 것이다. 사진을 한참 찍고 있는데 신부님이 도착했다. 신부님의 형과 여자분도 한 분 함께 왔길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려니 했다.

카메라와 노트북을 주섬주섬 싸서 나오려는데, 이효재 선생이 “밥 차려 놓았는데 그냥 가면

어떡하느냐?”며 “겉절이 맛있으니 밥 먹고 가라”고 역정을 냈다. 널따란 식탁에 신부님 일행 3명, 나, 이효재 선생, 가게 직원, 가사도우미까지 7명이 둘러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붙잡혀서 밥을 먹으면서 수인사를 나눈 뒤 신부님께 물어봤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언제부터 아셨어요? 이렇게 식사 대접까지 받으시니 오래된 사이시지요?”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어저께 절에서 처음 봤어요.”

 


 

 

집 앞 작은 바위 위에 앉아있는 이효재

 

이효재

 

한복 디자이너, 1958년생

배우자 임동창(피아니스트)

국립공원 홍보대사 / 길상사 홍보대사 / 제천시 약선요리 약채락 홍보대사 / 서울특별시청 환경 홍보대사

저서 《효재의 살림풍류》, 《아름다운 우리 생활 문화 시리즈》, 《효재처럼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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