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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스토리


발행호 479 호

2017.04.04

어멍의 바다에 뛰어든 애기해녀 채지애

어멍의 바다에 뛰어든 애기해녀 채지애 

 

채지애. 아직은 바다가 서툰 3년 차 애기해녀. 해녀 중 최고 실력을 갖췄다는 대상군 해녀가 엄마였다. 엄마는 딸만큼은 고된 해녀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딸은 자라 두 아이의 엄마가 됐고, 해녀가 됐다. 그렇게 깊이를 알 수 없는 엄마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사진 우현석, 박은경

 

 

우도 해녀들을 취재해서 글을 쓰려고 제주에 내려왔는데 풍랑이 거세 사흘째 배가 뜨지 못했다. 도착한 당일은 물론 돌아오는 날 오전까지 풍랑주의보가 발효됐다. 김포로 돌아오는 항공편이 오후 다섯 시 제주 출발이라 빌린 차를 반납하고 공항에 가려면 늦어도 다음 날 3시에는 철수해야 했다. 항공편 때문에 배를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 어디 머무를 곳도 없어 해가 지고 나서까지 이곳저곳, 글감을 찾아 기웃거리다가 8시가 넘어 온평포구에 도착했다. 배도 고프고 잠도 자야겠기에 숙소에 들어가 주인 할머니를 붙잡고 이 얘기 저 얘기 귀동냥하기 시작 했다. 그런데 웬만한 바닷가 마을 여인네들이 그렇듯 이 할머니도 ‘현역 해녀’라고 했다.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이 할머니 피곤했는지 “이웃 마을에 대학 나온 젊은 처자가 해녀를 하고 있으니 그이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래 오늘은 피곤하고 밤도 깊었으니 이만 자자’ 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지만 강풍에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에 잠이 오질 않았다.

 

바다로 들어가려고 걸어가는 해녀를 바라보는 개 한마리 

 

이튿날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 아침을 먹고 젊은 해녀가 살고 있다는 성산읍 삼달하동으로 향했다. 주소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그 해녀를 찾을 수 있을까? 마을로 들어가 아무 집이나 들어가 수소문한 지 세 번 만에 그의 이름이 ‘채지애’라는 것과 집의 위치를 알아냈다.

집을 찾아 문을 디밀고 들어갔더니 젊은 여인네가 나갈 채비를 하고 있길래 ‘여차여차 해서 당신을 인터뷰 하고 싶다’고 청했다. 집을 나서려던 그녀는 “분식센터에 아르바이트 가야 하는데 조금 늦게 가도 되는지 물어보겠다”고 했다. 통화를 마친 그는 “조금 늦게 가도 될 것 같다”며 기자에게 무슨 차를 마실지 물어 왔다.

 

 

물질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3년 됐어요. 이젠 익숙해졌죠. 2013년, 시작한 첫해에는 임신 중이어서 다른 해녀들이 수확한 자루를 끌어내주는 물 마중만 했어요.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나이와 학력을 알고 싶습니다.

서른다섯 살이에요. 한라대학교 피부미용과를 졸업하고 서울에 가서 10년 동안 미용 일을 하다가 둘째 애를 갖고 출산하러 와서 제주에 눌러앉았어요. 첫째 아이를 낳고 보니 미용사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서비스업은 공휴일도 출근해야 하잖아요. 미용 일이라는 게 출근 시간은 있지만 퇴근 시간은 일정치 않거든요. 미용실을 차려 직접 운영해보기도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어요. 그러던 차에 집에 내려왔다가 ‘해녀 일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젊은 해녀는 없었지요?

네. 시작할 때만 해도 해녀들이 자기 일을 부끄러워했어요. 지금도 작업에 방해가 되는 걸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때보다는 자부심이 생겼어요.

 

 

15년 전, 화산 폭발로 비양도가 생겨난 지 1000년이 됐다고 해서 취재하러 왔을 때 해녀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가 혼쭐났던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해녀와 마주 앉아 인터뷰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 줄 꿈도 꾸지 못했다.

 

잠수복을 입고 앉아있는 채지애 

 

 

물질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뭐라던가요?

엄마도 해녀인데 반대했어요.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한번 작업 나가면 6시간 이상 일해야 하니 못 견딜 거라고 생각했겠죠. 엄마는 상군(해녀는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이다보니 나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어요. 게다가 그 때까지만 해도 자존감이 없어서 딸까지 해녀가 된다는 걸 싫어했어요. 심지어는 친구들까지 ‘물질 배운다면서?’ 하고 비아냥거렸으니까요. 하지만 먼 미래를 바라봤을 때, 정년도 없는 데다 아이들과 시간도 많이 가질 수 있어서 ‘이만한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저는 바닷가 에서 자라서 수영도 잘하고 물에 익숙했어요.

 

그래서 해보니 일이 쉽던가요?

아뇨.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물질은 놀이로 하던 수영과는 달랐어요. 잠수복을 입으면 부력 때문에 저절로 몸이 물에 떠서 잠수할 수 없는 데다, 고무 옷은 타이트해서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부력을 이기고 물 아래로 들어가려고 하니 체력이 금세 소진됐어요. 물속에서는 물결에 흔들려 한동안 멀미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헛구역질에 토하기까지 했으니까요. ‘내가 이 일을 왜 했을까?’ 후회도 했어요. 엄마는 ‘대학까지 가르쳐 놓았더니 물질을 한다’고 섭섭해서 신경도 안 썼어요. 잠수복값이 30 만원이었는데, 계속할 수 있을지 몰라서 구입을 망설였어요. 결국 잠수복가게 사장님이 중고를 빌려줬어요. 그런데 엄마는 잠수복을 입는 법도 안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일을 시작했습니까.

처음에는 얕은 물에서 보말(고둥)을 잡았어요. 그런데도 멀미를 심하게 해서 집에 가면 드러누웠지요. 그런데 첫째 아이가 ‘보말죽이 맛이 있다’면서 ‘또 해달라’는 거예요. 보말죽을 해먹이겠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바닷물에 들어가게 된 거지요. 우리 엄마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가 정말 해녀가 되려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그때부터 나를 인정해주시더라고요.

 

 

딸의 학비를 위해 물질을 했던 노모의 노고와 또 그 딸이 어린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는 연대의 순환 앞에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아! 수평선에 의지한 바다는 평행한데 그 속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사랑은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바다 수면 위에서 숨을 돌리는 해녀 

 

 

일은 빨리 익숙해지던가요.

물질은 설명을 듣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물에 들어갈 때 마다 ‘이럴 땐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요령이 생기지요. 조금 전에 전표를 정리하다 보니 처음 시작했을 때 수확한 전표가 나왔어요. 한 달 동안 10kg 잡아서 4만원 벌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내가 이런 적도 있었구나’ 웃음이 나오더군요. 소라는 아무 때나 채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달에 3~4차례, 6일 정도 잡을 수 있어요. 요즘은 손에 익어서 2~3일 물질하면 60~80kg 정도는 잡아요. 친정엄마는 130kg 정도 잡지요. 처음에 엄마가 잡는 양을 보고, 해녀는 돈을 잘 버는 줄 알았다니까요. 엄마는 그 당시에 해녀 회장이었어요. 사람들은 ‘엄마 덕에 해녀 된 것 아니냐?’고 하는데 사실 해녀 되는 걸 반대했던 엄마가 제일 높은 벽이었어요.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물어봅시다. 해녀 벌이는 어떻습니까.

요즘은 바닷속에 백화현상(바닷물에 녹아 있는 탄산칼슘이 고체가 되어 하얗게 보이는 것)이 일어나면서 먹이가 줄어든 탓에 소라도 줄었어요. 사람들은 해녀 수입이 좋은 줄 아는데, 그렇게 돈을 많이 벌면 내가 왜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하겠어요? 한 달에 풍파가 없어서 물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은 18일 안팎이에요. 18일 동안 벌어 봤자, 얼마나 벌겠냐고요. 그래서 엄마하고 귤 농사 6000평을 같이 하고 있어요. 어떤 방송에서 ‘해녀가 하루에 50만원을 번다’고 하던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렇게 벌이도 시원치 않은 해녀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뭡니까.

엄마는 당신이 해녀를 해서 대학까지 보낸 딸이 대를 이어서 물질을 한다는 것이 불만이었어요. 그래서 나라도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불원천리 달려가죠. 해녀도 당당한 직업이고 창피한 일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고 싶어요. 그런 뜻이 통했는지 엄마와 삼춘(제주에서 선배 해녀를 부르는 통칭)들도 이제는 나를 해녀로 인정해줘요. 그 밖에도 ‘해녀가 할 만하다’라고 느낀 것은 서비스업을 할 때 사람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해녀 일을 하면서 그 상처가 치유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때는 오래 서 있다 보니 무릎도 안 좋고, 입원도 자주 했어요. 인간관계로 상처를 받으면서 사람이 싫어져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물질과 과수원 일은 그래서 좋아요. 바다와 나무는 말이 없으니까요. 물질하면서 다시 사람이 좋아졌어요. 해녀의 수확물이 개인소득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해 녀 공동체는 오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연락을 해서 바다에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요. 위험하면 서로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지요.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눠서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서로 보호하면서 일을 하지요. 상군들은 보통 100kg 씩 잡기 때문에 혼자 들고나올 수 없어요. 보통 나올 때는 함께 나오고,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들까지 일일이 확인해요. 나는 아이들이 어려서 가끔 병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물에서 먼저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삼춘들이 잡은 것을 나눠 줘요. 소라 한 개, 전복 한 개를 채취할 때 얼마나 숨을 참고, 얼마나 힘든지 아는 만큼, 삼춘들이 고마워요. 그걸 나눠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바닷속에는 길이 있어요. 물속이라도 아무 데나 헤엄쳐 다니면 위험해요. 파도나 해류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길을 몰라서 가까운 길로 질러갔어요. 돌고래가 오면 삼춘들이 소리를 질러 알려주기도 해요. 돌고래들이 사람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지만 장난을 걸어오는데 그러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상군들이 알려줘서 대비하지요. 바다에 들어갈 때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기도 하는데 할머니들이 돌봐주기도 하고, 아이들도 좋아해요.

 

바닷가 바위 위에서 장비를 들고 서있는 채지애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언론매체에서 연락을 많이 해 와요. 하지만 아직 응한 적은 없어요.

 

왜 응하지 않았습니까.

해녀가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데 내가 기여한 것이 없으니까요. 다만 강의를 하러 다니는 이유는 해녀가 이런 일을 한다는 걸 알려서 삼춘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에요. 언론에 노출을 꺼리는 또 다른 이유는 예전에는 관심도 없다가 유네스코에 등재되니까 젊은 사람 찾아서 취재하겠다는 게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에요.

 

강의를 통해 해녀들의 어떤 문화를 알리고 싶었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저는 상, 중, 하군 경계가 지어져 있는 게 좋아요. 각자 위치에 따른 위계질서가 잡혀 있는 거죠. 그런 체계는 합리적이에요. 어떨 때는 ‘이분들을 국회로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니까요. 해녀들은 잡은 수확물이 너무 어리면 방사해주고, 종패 작업을 해서 해산물의 씨가 마르는 것을 방지하기도 해요.

 

이 글의 독자가 ‘나도 해녀가 돼야겠다’라는 꿈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께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실제로 서귀포시에서 운영하는 해녀학교가 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해녀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바로 해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턴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들었어요. 정작 나이 든 분들은 나서지 않는데 이제 갓 배운 저 같은 사람이 해녀라고 나서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해요. 나를 포함한 젊은 해녀들은 경솔한 행동으로 공동체에 분열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죠. 해녀 사회의 진입장벽이 높은 것은 혹여 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이가 들어왔다가 불화를 일으키고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서로의 인성을 봐 가면서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리발을 끼고 바닷가에 앉아 있는 모습 

 

 

물질하면서 위험한 순간은 없었습니까.

처음에 바다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해녀 한 분이 닻줄에 걸려서 익사한 사고가 있었어요. 그걸 보고 트라우마가 생겼지요. 그 후로는 닻줄만 봐도 놀라고는 해요. 그때 엄마도 함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내가 사고 난 줄 알고 많이 놀랐어요. 멀리 떨어져 있던 엄마는 구급차가 오는 걸 보고 ‘아이도 둘이나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헤엄쳐 나왔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대요. 나도 닻줄에 걸렸던 적이 있어요. 마침 해녀 회장님이 보고 풀어 주셨지요. 잠수복을 입으면 부력 때문에 가라앉질 않아서 허리에 찬 납 무게로 들어가는데 납줄이 풀리면서 바위에 끼어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어요. 기력이 약한 나이 든 분이나, 초보들에게 사고가 많이 나지요.

 

 

밥을 벌어먹기 위해 들어간 바닷속에는 바로 지척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부양한 식솔들의 생계를 위해 어두운 바다 밑으로 향하는 그녀들의 물질은 얼마나 지엄한 것인가? 가녀린 해녀들이 바다를 이기는 것인 지, 아니면 바다가 이들을 품어주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벽에 걸어놓은 잠수복 

 

 

직업병은 없습니까.

수압 때문에 귀가 먹먹해지는 등 잠수병이 생기기도 해요. 수심 20m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으니까 잠수병은 잘 걸리지 않지만 두통이 자주 와서 진통제를 상복하는 분들도 계세요. 저는 약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안 먹고 버티고 있지만, 깊은 데 들어갈 때는 약을 복용하지요. 사람마다 다르고, 체질 따라 다른데 나는 두통이 덜한 편이에요. 다른 해녀들이 ‘상군 엄마 체질을 타고났다’고 하지요.

 

경험이 쌓이면 상군이 되는 게 아니라 체질을 타고나야 합니까.

네. 오래 했다고 상군이 되는 게 아니라 타고난 체질이 있어야 해요. 나이가 들수록 숨이 짧아져서 상군에서 떨어져 나가는 경우도 많아요. 숨이 짧아지거나, 욕심이 과해 나올 때 쉴 숨을 남겨 놓지 않은 경우, 물을 먹는 것을 물숨이라고 해요. 값비싼 전복 같은 해산물을 보고 욕심이 나면 물숨을 쉬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보통은 잠수복을 입으면 몸이 물에 뜨지만 물숨을 쉬는 순간 몸은 물 위로 떠오르지 않게 되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숨이 짧아서 일단 올라왔다 다시 내려가면 좀 전에 봤던 전복이 눈에 띄지 않아요. 그런 것들은 스스로 체험하고 터득해야 배울 수 있어요. 해녀학교에서 배웠다고 해도 생계형 해녀가 되려면 몸소 체득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죠.

 

해녀 채지애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앞으로 계속 해녀를 할 생각이에요. 해녀는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삼춘들과 어울려 일을 하는 게 좋아요. 그리고 해녀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가서 얘기해 줄 거에요. 아직 3년밖에 안 됐기 때문에 인정을 받을만한 경력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최소 5년은 지나야 애기해녀를 면할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해녀와 관련된 자료와 소지품 같은 것도 모아볼 생각이에요.

 

 


 

 

약력

 

1983년 서귀포 생

2004년 한라대학교 피부미용과 졸업 / 2014년 해녀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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