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02
야구 이야기꾼 김은식
야구의 계절, 야구전문작가 김은식과 나눈 야구의 추억.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사진 우현석, KBO 홍보실, 브레인스토어 출판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가 올해 두산베어스의 프로야구 개막전을 보기 위해 내한해 화제가 됐었다. 리퍼트 전 대사의 한국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도 감안해야겠지만 야구의 본고장 출신인 이 사람이 개막전 관람을 위해 방한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야구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기자도 야구를 좋아해서 틈나는 대로 야구 관계자들을 인터뷰했다. 다만 개별 선수들보다는 야구 전체를 조망해 줄 수 있는 인물들을 만나왔다. 김성근 한화이글스 감독, 허구연 해설위원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물론 이종범, 양준혁, 이승엽 같은 선수들도 만나보고 싶었지만 야구 전체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이번에 만난 이도 야구 전체를 살펴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였다. 야구작가라는 직업도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름은 김은식. 초등학교 3학년인 열 살 때 프로야구가 막을 올린 후로 마니아가 됐다는 그는 정말 이것저것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다가(interviewer) 인터뷰에 응하는 입장(interviewee)이 됐습니다.
웬걸요. 인터뷰이 역할도 여러 번 해봤습니다. 스포츠 칼럼니스트 자격으로 인터뷰에 응한 적이 이미 여러 번 있습니다. 주로 인터넷 매체였고요. 오늘처럼 오프라인 매체와의 인터뷰는 처음입니다. 주로 프로야구 등 스포츠와 관련한 주제로 인터뷰를 합니다.
프로야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인가 봅니다.
네. 사람들이 제가 쓴 책은 많이 사서 읽지는 않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제 글을 많이 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 전에 사전조사를 위해 검색했더니 프로야구 출범하던 해에 열 살이었더군요. 야구를 일찍부터 좋아하셨나 봅니다.
73년생이니까 마흔다섯 살입니다. 그때는 동네 골목에서 고무공으로 야구를 하는 ‘찜뽕’ 같은 게 유행이었습니다. 갓 출범한 프로야구를 문화방송에서 띄우려고 애를 썼던 기억도 납니다. 고교야구가 인기가 있었고, 중계도 많이 해서 즐겨 보았습니다. 저도 그냥 또래들처럼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야구라 그런지 홈런이 고교야구보다 많이 나오더라고요. 특히 MBC 청룡에 김재박 선수의 수비를 보면서 ‘역시 프로는 고교야구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고교야구는 누가 우리 편인지 모호했지만 프로야구는 확실한 우리 팀이 있었지요. 그래서 재미를 붙이게 됐습니다.
어느 팀을 응원하십니까.
옛날에는 삼미, 청보, 태평양, 현대를 좋아했는데 야구에 관한 글을 쓰면서 야구 관계자들과 인간관계가 생기다 보니 선수 개인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팀이 이겼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한 프로구단들은 인천 연고팀들인데, 제가 그곳 출신이라 그렇습니다. 그 팀들은 대부분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현대가 우승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 중하위권에서 맴돌던 팀들이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신문사는 경제신문이어서 체육부가 없었다. 그래서 좋아하던 프로야구와도 소원해졌다. 그러다가 주말섹션팀장을 할 때 내가 고정적으로 쓰던 와이드인터뷰 코너에서 김성근 감독을 인터뷰하게 됐다. 그런데 중앙일간지 기자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취재장벽이 느껴졌다. 조직에 소속되지 않는 작가는 고충이 더 컸을 것 같았다.
취재하면서 보이지 않는 벽은 없던가요? 그 벽을 어떻게 뚫고 취재를 했습니까.
고생이 오죽했겠습니까.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미디어나 조직에 소속되지 않았으니 ‘내가 누구’라고 밝히기가 애매했습니다. 어느 매체에 실리는 글인지를 설명하고 취재 협조를 구했지요. 하지만 고생하는 기간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야구에 관한 글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요.
2006년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외환위기 때 야구 열기가 식기 시작하더니 2006년까지 시원치 않았습니다. 열기가 식기 시작하던 그때부터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글들이 포털에 노출되면서 글의 주인공이었던 선수나 감독들이 연락을 해 와서 만나기도 하고, 알음알음 인맥이 넓어지기 시작했지요. 물론 험한 경우를 당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만수, 로이스터 감독 등은 친화력이 있고 김응용, 김성근 감독도 관록의 유머코드가 있는 분들입니다. 오래 만나고 지내다 보면 정도 들고 그러지요.
CBS 라디오 출연부터 시작해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프로그램 진행 이전과 이후에 야구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습니까.
CBS 측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로 연결해서 옛날 야구선수에 대한 소개를 해달라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아시겠지만 방송에서 10분 떠들려면 원고를 엄청 써 놓아야 합니다. 그 원고를 한 번 쓰고 버리기가 아까워 모아서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50주 동안 하다가 프로그램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지요. 다른 매체와 인터뷰할 때 기자가 ‘CBS 프로그램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길래 ‘100회까지 하겠다’고 했는데 50회 만에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글을 써서 100회를 채웠습니다. 그걸 책으로 냈지요. 야구에 관해 쓴 첫 책이었습니다. 연재가 끝나갈 무렵 SK 와이번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했습니다. SK 측에서 ‘우승 과정을 기록한 책을 내고 싶다’고 해서 전지훈련을 따라가서 선수들을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신구세대를 아우르는 작가라고 하던데요.
한 번은 PC방이 있는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게임을 하고 나오던 중고생들이 ‘선수아이템을 구입했다’고 하면서 ‘김은식이 쓴 글을 보고 샀다’고 했습니다. 요즘 세대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알려진 것 같습니다.
역대 선수 중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선동열입니다. 압도적인 기량을 가진 군계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투수가 타자에 비해 경기 지배력이 크니까요. 최동원은 선수로서도 빼어나지만, 성적 외에 로망이라는 더 큰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동원의 기록도 대단하지만 선동열만큼은 아니지요. 최동원은 기량을 넘어서 감성을 던진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시리즈 4승이라든지, 완투 능력 같은 점이 스토리텔링이 되지요.
고 김동엽 감독이 MBC를 맡던 시절 김재박 전 감독이 구원 투수로 나와 승리를 챙긴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네. 그 기록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장에 가서 보지는 않았습니다. 야구 중계는 라디오로 많이 듣는 편입니다. 2006~2007년 글을 쓰면서 야구장에 가서 많이 봤고, 이후로는 TV로 많이 봤지요. TV로 중계를 보면 여러 팀의 경기를 동시에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집사람이 한화 이글스의 팬이어서 한화 경기를 주로 봅니다. 오히려 마니아들에 비해 경기장 가는 횟수는 적은 편입니다.
그 밖에 기억에 남는 경기는 없습니까.
94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태평양 투수 김홍집 선수가 완투했는데 10회 말에 LG 김선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졌습니다. 공이 날아가는 순간 ‘담장을 넘어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넘어가고 말더군요. 81년 한대화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홈런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야구를 볼 때 팀을 운용하는 감독들의 수 싸움을 즐겨 보는 편인데 감독 중에서는 누가 최고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감독의 위상이 높은 편입니다. 선수들도 감독에게 많이 의존하지요.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김영덕 감독, 서영무 감독 시절만 해도 그룹 임원에게 간섭을 받았으니까요. 프로야구가 실업야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실업야구 시절 선수, 코치, 감독들은 사원, 대리, 부장, 지점장 보직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임원들이 와서 지시하면 따를 수밖에요. 하지만 백인천, 강병철, 김성근 감독은 프런트와 충돌하면서 할 말을 했지요. 그들의 배짱을 통해서 감독의 권한이 정립됐다고 봅니다. 요즘은 꿈도 못 꿀 일이지만요. 최근에는 롯데가 선수 기용과 관련해 경영진이 간섭을 하고, CCTV로 감시를 한 일이 불거지면서 되레 주도권이 감독에게 넘어왔습니다. 감독의 권한 강화는 80년대 말 90년대 초로 넘어오면서 획을 그었습니다. 특히 김성근 감독은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후대 감독들이 그 뒤를 따라가야 할 것으로 생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역할을 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한국 프로야구 감독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 것은 그 세 사람입니다. 그분들의 열정이 지나치다 보니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 것은 어쩔 수 없지요. 뭐랄까? 김응용, 김인식도 그렇지만 김성근 감독은 야구계의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듭니다.
김은식 작가는 아주 특이한 존재다. 모두에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어떤 조직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채 야구를 기록하고 평론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야구를 보는 그의 시각은 보다 독립적이고, 주관이 뚜렷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의 인프라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궁금해졌다.
저변을 놓고 볼 때 우리나라에 10개 프로구단은 많은 편입니까? 아니면 적은 편입니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많은 편이지요. 일본, 미국은 1000만명당 1팀이고, 우리는 2팀입니다. 꼭 인구비례로 볼 일은 아니지만요. 기업 돈으로 팀을 운영하다 보니 팬들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게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그게 나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5팀으로 리그를 운영할 수는 없으니까요. 10개 팀이 되면서 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예전에 허구연 해설위원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 허 위원은 야구 대중화를 위해서 팬들이 직접 야구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데 김 작가도 야구를 하십니까.
네. 저도 야구를 합니다. 사회인 야구를 하는 입장에서 야구장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삶의 가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지역사회에 야구장이나 도서관이 들어오는 것은 마땅히 환영해야 합니다. 도쿄에만 가 봐도 외곽에 야구장이 많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가격이 오르기만 바랄 게 아니라 생활체육과 여가 활용 등 삶의 질에 대한 생각도 해 봐야 합니다. 야구뿐 아니라 생활체육 공간의 확장까지 내다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WBC 예선에서 탈락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탈락의 원인으로 취약한 인프라 등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야구는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요.
저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계속 예선에서 탈락할 것 같습니다. 월드컵 1회 우승국이 우루과이인데, 우루과이는 그 후로 우승을 못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초대 우승국이라고는 하지만, 대회의 체계가 정립되지 못한 상태라 우승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이번에 4강에 못 오른 건 당연합니다. WBC에서 어느 나라가 우승하건 간에 그것은 바로 미국 메이저리그가 우승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만 우승에 대한 열망이 절박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월드컵처럼 야구도 지역 예선을 통과해서 본선으로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리라 봅니다.
한국 프로야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냉정하고 객관적이었다. 하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기자에게는 너무 인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가 해체됐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양 원더스라는 구단의 존재를 놓고 볼 때 순기능이 많았다고 봅니다. 프로구단들의 텃세가 심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원더스가 해체된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프로야구계에서는 고양 원더스와 허민 구단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습니다. 돈을 많이 써서 그 후로 독립구단이 나오는 걸 막았다는 거지요. 프로구단은 기업들의 몫이고 미국에는 메이저나 마이너리그와 별도로 운영되는 중소리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양 원더스는 KBO로부터 독립적인 구단이 아니었습니다. 집행부에서 독단적으로 팀을 받아들였던 것이고, 구단 이사회에서 승인한 적이 없으니까 구단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겠죠. 하지만 고양 원더스는 크게 기여했다고 봅니다. 격려해 줬으면 좀 더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PROFILE
작가, 칼럼니스트, 강사
네이버·다음·네이트 야구 칼럼 연재
저서
《야구의 추억》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한국프로야구 결정적 30장면》 《고양 원더스 이야기》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 《이회영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 《헌법과 인권》 등 다수
강의
EBS, 서울시민청, 서울시교육청,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한겨레문화센터 등에서 글쓰기와 논술, 논술지도법 등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