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3
하멜이 만난 조선의 흔적을 찾아서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는 2018년은 하멜이 표류한 지 365년째 되는 해다. 이번 달 ‘문화와 사람’에서는 하멜이 우리나라에 남긴 자취와 기록에 대해 되짚어 보려고 한다.
에디터 박은경 글 우현석(서울경제신문 객원기자, 여행작가) 사진 박은경, 강진군청
효종 4년인 1653년 7월, 제주도 해역에서 범선 한 척이 태풍을 만나 난파했다. 제주 목사 이원진이 이들을 발견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조정에 도움을 청했다. 조정에서는 박연(네덜란드 이름 얀 얀스 벨테브레)을 급파했다. 표류해 온 선원들은 박연을 반겼지만, 박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이미 조선에 거주한 지 26년이 흘러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를 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일하던 동인도회사의 선원들과 며칠 동안 시간을 보내자 박연은 더듬더듬 대화를 시작했다. 기억 뒤안으로 흘려보냈던 모국어가 조금씩 생각나기 시작한 것이다.
박연이 해후한 조국 네덜란드의 선원은 모두 37명. 그중 한 명은 훗날 표류기로 유명해진 ‘헨드릭 하멜’이었다. 스페르웨르호의 서기로 훗날, 조선 탈출에 성공한 후 네덜란드로 귀환해 ‘난선제주도난파기’와 부록 ‘조선국기’를 펴내 큰돈을 벌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럽에 처음 알린 주인공이다.
네덜란드가 제작하여 기증한 하멜 동상
제주의 하멜
하멜은 2001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인이었다. 최소한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을 맡아 팀을 4강으로 이끌기 전까지는 그랬다. 2002년 이후 그 자리를 히딩크에게 넘겨주긴 했지만 하멜은 아직도 국내에서는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모두에도 밝힌 것처럼 조선에서 탈출해 모국으로 돌아가 유럽에 조선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책을 펴냈기 때문이다.
기자는 내년이 하멜 표류 365주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과, 이 역사의 일단을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지난해 겨울 최일봉 한라병원장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의료인인 최 원장은 하멜 관련 사업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왜 이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묻자 “내가 거주하고 있는 제주에 그런 역사가 서려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며 “나도 하멜이 왔던 그 자취를 따라 모험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 원장에게 바람을 넣은 사람은 시인이며 해양탐험가인 채바다 씨다. 제주 하멜기념사업회장을 겸하고 있는 채 씨는 이미 15년 전부터 네덜란드 대사관과 교류를 가져오고 있다. 채 씨는 대사관 외에도 하멜의 고향인 호르큼시, 하멜재단 등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15년 전 호르큼시 관계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들은 하멜이 한국에서 이렇게 유명한 인물인 줄 모르고 있었다”며 “15년 전 제주국립박물관에서 오키나와 유물전을 했는데 그때 네덜란드 사람들이 방문해 하멜이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것을 알게 됐고, 비로소 그들이 우리나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제주 하멜기념비_제주관광공사 제공
이후 네덜란드 관계자들은 1년에 한두 번씩 우리나라를 찾고 있다. 특히 호르큼시 당국은 네덜란드에 있는 하멜의 생가를 사들여 기념관을 만들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하멜보다 앞서 우리나라에 표류해 조선 여자를 아내로 맞고, 관직까지 오른 박연도 있었는데, 왜 하멜만 유독 부각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출간한 책 때문이다.
직업이 서기였던 하멜은 조선 억류 기간에 보고 겪은 풍물을 기록해 책을 펴냈다. 그 이유는 투철한 그의 직업의식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조선에서 보낸 13년간의 급여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13년간 서기로서 놀고먹지 않고, 겪은 일들을 기록했다는 것을 동인도회사에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아내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인도회사는 하멜에게 약간의 위로금을 주는 것으로 13년간의 보상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보상은 의외의 곳에서 이뤄졌다. 그의 저서가 1668년에 네덜란드어·영역본·불역본·독역본으로 발간되면서 적잖은 인세를 챙기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출판되자 네덜란드와 유럽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은둔의 나라 조선이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범선 코레아호를 건조했지만 일본 바쿠후의 반대로 운항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1692년 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 후 200여 년이 지나 하멜은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날리게 됐고, 마침내 2018년 그가 표류한 지 365주년을 맞게 됐다.
하멜보고서
기자는 이 대목에서 채바다 회장과 최일봉 원장 같은 사람들이 왜 하멜의 역사를 되살려내려고 노력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채 회장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17세기에 네덜란드는 세계무역의 주역이었다. 오늘날 일본을 만든 나라였고, 유럽의 관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하멜이 제주와 한국을 유럽에 알릴 수 있는 연결고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걸 간과하고 있는 게 아쉽다.”
강진에서 부는 ‘하멜’ 바람
그런 와중에 취재차 들른 강진군에서는 하멜촌 조성사업을 하는 등 하멜을 기억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남 강진군은 하멜이 조선에 머물렀던 13년 세월 중 7년을 머문 곳이다. 그런 만큼 강진군은 하멜 관련 기념사업이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편이다. 일례로 강진군은 병영면 지로리 일대에 총사업비 150억원을 투입, 하멜촌 조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재연 강진군 학예사는 “하멜촌 조성은 조선을 유럽에 처음 알린 헨드릭 하멜이 전라병영성에서 7년간 생활했던 상황과 그의 고향 네덜란드의 모습을 재현해 관광자원화하려는 취지로 진행되고 있다”며 “내년에 개최되는 평창동계올림픽과 맞물려 자국팀을 응원하러 오는 네덜란드 관광객들을 강진군에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진군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이를 위해 강진군은 오는 2019년 개관을 목표로 하멜기념관을 증축하고, 하멜이 타고 왔던 스페르웨르호를 복원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4D 영상관과 숙박시설, 튤립정원 등 부대시설도 조만간 착공할 예정이다.
강진군과 하멜의 고향 호르큼시와의 교류는 이미 지난 1998년 자매결연을 통해 시작됐다. 이어 2015년 호르큼시 하멜기념관 개관과 2016년 병영 하멜촌 조성이 잇따르며, 교류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또 지난 6월 13일에는 호르큼시의 에버트 반 스프라켈라르 하멜기념관장 등 네덜란드 관계자 10명이 강진을 찾아 하멜촌 조성을 위한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그동안 두 지역의 교류는 강진에서 청자축제 등이 열리면 네덜란드 사람들을 초청했고, 호르큼시는 하멜 동상과 17세기 대포를 주조해 강진군에 기증했다. 강진군은 네덜란드 하멜하우스에 3000만원 상당의 우리나라 민속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재연 학예사는 이와 관련해 “현재 네덜란드 측과는 제주, 강진, 여수시가 교류를 하고 있는데 자매결연은 강진군만 맺고 있다”며 “다른 지자체에서도 제의가 있었던 거로 아는데, 네덜란드 측에서는 강진군 한 곳하고만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하멜이 타고 왔던 스페르웨르호 모형
강진군이나 호르큼시 모두 하멜을 연결 고리로 서로 간 교류를 확대시켜나가기를 원하지만 네덜란드 측이 보다 현실적인 편이다. 최근 호르큼시장이 방문했을 때 그는 조선업체 관계자들을 대동했다. 또 네덜란드 측에서는 강진군에 ‘수제 맥주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해오기도 했다. 과거의 인연을 당대의 비즈니스에 접목하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하멜 표류 365주년이자 평창동계올림픽이라는 두 개의 이벤트가 겹쳐지는 상황에서도 ‘표류 365주년’에 초점을 맞춘 관(官) 주도의 움직임은 없는 실정이다.
남겨진 하멜의 흔적들
하멜이 승선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 선원들은 1653년 1월 네덜란드를 떠나 같은 해 6월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7월 타이완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8월 중순 제주도 서귀포 인근 해안에 표착해 목숨을 건졌다.
하멜과 그의 동료들은 조선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부단히 탈출을 시도했다. 한 번은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하멜 일행은 이들을 찾아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런 사실이 발각돼 처형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멜 일행이 태풍을 만나 표착한 곳으로 추정되는 제주도 해안에 설치된 하멜상선
1656년 3월 한양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대포를 주조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던 이들은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성에서 기거했다. 이들은 병영성에서 노역에 종사했는데 흉년으로 기근이 계속되자 구걸로 연명하기도 했다. 여수로 이송됐던 하멜은 1666년 마침내 동료 7명과 함께 배를 타고 탈출, 일본 히라도로 건너가서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사무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 바쿠후를 통해 조선에 남아 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석방 교섭이 진행됐고, 1667년 교섭이 성사돼 조선에 남아 있던 선원들이 석방되어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하지만 일설에 따르면 일행 중 7명은 조선에 남았다는 주장도 있다. 효종은 잔류자들에게 남(南)씨 성을 하사했고, 강진 일대에 뿌리를 내린 이들은 병영 남씨의 시조가 됐고, 후일 의령 남씨에 편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멜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기거했던 전라병영성. 하멜 일행은 이곳에서 노역에 종사하다 여수로 이송된 후 탈출했다
Story telling about Hamel
기자는 30여 년 전 대학생 시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었다. 그때 그 유명한 로렐라이 언덕을 가서 받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 볼 것도 없는 라인강 언덕배기가 단지 신비로운 전설이 깃들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명소가 돼 있었다. 여행을 다닐수록 새롭게 깨닫는 사실은 여행의 수용태세는 대단한 시설이나 인프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방자치제도의 막이 오른 이후 우리나라의 여러 지자체들은 관광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저마다 다양한 축제를 개최하고, 전시시설을 확충하는 등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은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그 아름다운 산하에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철근 콘크리트로 구조물을 세워 놓고 관광객들이 몰려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지역 공무원들에게 얘기한다. “저 돈으로 이 고장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개발해보라”고. “그리고 저 돈을 인건비로 활용해서 저 들판에, 거리에 널려 있는 검은 비닐과 쓰레기부터 좀 치워 보라”고.
관광의 수용태세는 인프라가 아니다. 이야기와 청결이 우선이다.
365년 전 제주에 표착했던 하멜이 우리나라 국민들과, 더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태어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