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0
쓸쓸하고도 따스한 골목을 맴돌 때-묵호 논골담길
어느 작은 바닷가 마을, 비탈진 언덕엔 집들이 촘촘하다. 오래전 활기 넘치던 그때에 비해 고요하지만 그네들의 삶을 꺼내볼 수 있는 담화가 동네를 물들인다. 골목을 누비다보면 시간도 잊은 채, 작게 빛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긴다.
글 박산하(여행작가) 사진 박산하, 동해시청, 한국관광공사 DB
묵호 논골담길 | 1.2km, 약 1시간 30분 소요
1941년 개항된 묵호항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논골담길은 여러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묵호의 현재와 과거가 담겨 있는 논골1길, 논골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가 흐르는 논골2길, 묵호의 옛 추억을 되새겨볼 수 있는 논골3길, 그리고 논골의 희망을 푸르른 동해를 배경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등대오름길 등 4개의 골목이다. 골목은 얼기설기 포개져 있어 어느 길을 가든 서로 만난다. 꼭대기에 있는 등대 앞이 일출 명소이며 걸어서 어달해수욕장과 횟집거리, 묵호항 수변공원도 함께 둘러보기 좋다.
추천 코스
등대오름길 | 300m, 약 10분 소요
묵호항 수변공원→원더크루즈*→논골주막*→아이 러브 묵호*→빨래*→리어카*→명태의 꿈*→논골매표소*→묵호등대
논골2길 | 300m, 약 10분 소요
비누방울*→논골호*→논골마리오*→묵호역*→묵호극장*→집어등불빛*→묵호밤거리*→문방구*→집어등나무*→리어카*→기계할아버지*→논골매표소*→묵호등대
*벽화 이름
애잔하고 다정한 담화(淡畫) 마을을 만나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묵호항은 불빛이 반짝거리던 마을이었다. 밤바다엔 오징어배 불빛이, 비탈진 골목엔 남편을 기다리느라 불을 끄지 않은 집들이 빼곡했다. 당시 2만여 명이 묵호항을 둘러싸고 빼곡하게 머물렀으며 서울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 물건도 이곳에 오면 널려 있다 했다. 맨손으로 와도 살 만한 곳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 한 집이 생겨날 정도로 손바닥만 한 땅에 집도 많이 지어 올렸다. 리어카 하나도 오가기 힘든 좁은 언덕인 논골담길은 상하수도 시설도 변변치 않았다. 그래서 항으로 끌어올린 오징어와 명태는 그곳 바닷물에 씻어 아낙네는 빨간 고무 대야에, 남정네는 지게에 지고 올랐다. 오징어가 뿜어대고 물고기들이 뚝뚝 흘리는 바닷물은 골목을 미끌미끌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논바닥처럼 미끄럽다고 ‘논골’이라 불리던 마을이다. 골목 꼭대기엔 오징어와 명태를 말리던 덕장이 널찍하게 펼쳐졌고 몇 마지기의 논도 바닷바람을 맞으며 쌀을 내었다.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앉은 그네들의 삶이 옹골지게 피어난 때였다.
묵호항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논골담길
논골담길에서 만난 바다를 향해 있는 카페
하지만 화려했던 시절이 지나고 지금은 빈집이 반이 넘는다. 명태는 대부분 수입을 하고 오징어배도 잘 뜨지 않는다. 자식들을 시집 장가보낸 어르신들만 쓸쓸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렇게 스산했던 마을에 2010년 여름부터 다정한 작품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묵호를 재발견하고자 한 프로젝트였다. 작가들은 어르신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꼼꼼히 기록했고 골목 곳곳에 담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골목 사람들은 처음엔 노후한 마을에 와서 궂은일을 한다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어르신들의 소소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였다. “워낙 비탈져서 좀 오르기 힘들어야제”라고 말하면 엘리베이터를 그렸고, “나팔꽃을 참 좋아했지…”라고 말하면 대문에 일 년 내내 시들지 않는 꽃을 그렸다. 어느새 어르신들도 예쁜 그림도 그려주고 말동무도 되어주는 그들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었고 페인트칠까지 거들었다. 이렇게 골목 사이사이 그네들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들로 물들여졌다.
마을 곳곳 담화는 근사한 포토존이다
벽화에서 바다에서 다정하게 말을 거는 동네
기차 묵호역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논골담길은 넉넉잡고 2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동네의 매력을 알기 위해선 불빛 반짝이는 밤바다, 동그란 해가 떠오르는 새벽, 그리고 바지런히 텃밭을 가꾸는 할머니들과 한소끔 쉬어가며 이야기해야 한다. 하루를 온전히 보내기 위해 논골담길 골목 중간에 만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것도 추천한다.
“아침엔 빵 냄새로 잠을 깨워줘요. 논골담길 촘촘한 지붕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게스트하우스 카페 공간에 앉아 있으면 산토리니와는 또 다른, 정다운 풍경에 마음을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비좁은 골목 사이 이렇게 아담하고 옹송그린 공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여쁜 곳이다. 올 초여름에 오픈한 게스트하우스라며 후배가 소개해준 ‘103LAB’은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언덕에 촘촘하게 자리한 정다운 집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내려놓고 골목 탐험을 떠난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골목은 지도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길을 잃지도 않고 금세 이 낯선 동네가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해질 터다.
가벼운 차림으로 논골담길 산책에 나서본다. 색색의 집어등을 매단 나무를 만난다. 집어등은 고기를 모이게 하는 등으로 그네들에게 가로등보다 몇 배는 더 소중한 빛이었으리라. ‘집어등나무’를 지나면 신비한 색으로 물든 바다를 만난다. 이 동네에서 쑥스러움을 가장 많이 타시는 할머니 댁이다. 화투도 배우지 않아 노인정에 가지도 않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신단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갈매기를 좋아하긴 한데…”라고 말씀하셨다는 할머니. 그래서 해가 떠오르는 바다 위에 흰 날개를 활짝 편 갈매기를 그려 넣었다. 서향집이라 해 뜨는 것을 볼 수 없기에 예쁜 해도 선물해 드렸다.
논골담길 산책
할머니 뒷집에는 보자마자 웃음이 빵 터져 나오는 ‘원더우먼’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묵호항의 어머니들은 제주 해녀보다 더 바지런했단다. 자기 몸보다 더 큰 짐을 번쩍 들고 비탈길을 오르내렸을 어머니들은 그야말로 세상 무섭지 않은 천하무적이었을 것이다. 원더우먼을 지나면 출동을 기다리는 오징어 군단이 쪼르르 빨랫줄에 널려 있다. 오징어 너머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얼굴을 쑥, 내민다.
“예전엔 빨래보다 오징어가 더 많이 널려 있었제…” 지나가는 할아버지께서 무심코 흘리신 말씀에 기어코 모험담을 끝까지 듣게 된다.
“옛적에는, 배 한 번 타고도 집 한 채를 살만했지. 그렇게 자슥들 서울로 핵교 보내고 했는기라. 그땐 돈이 차고 넘쳐 개들도 지폐를 물고 다녔어….” 어느샌가 할아버지의 말씀도 골목 끝으로 총총 사라진다.
오징어 군단 담화집에서 만난 논골담길의 터줏대감
논골담길의 대표 캐릭터, 원더우먼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로고를 패러디한 ‘묵호벅스’는 작가들의 센스가 한껏 돋보이는 작품이다. 묵호벅스에서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지는 곳에 닿으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언덕을 오르는 어르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꼭대기 집까지 오르자면 몇 번이고 쉬어 가야 했던 것. 그 고단함을 덜어주고 싶은 작가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논골상회’는 높은 계단을 오르내리던 주민들의 유일한 편의시설이자 새마을운동 땐 집회 장소였단다. 막걸리 한 됫박 마시며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묵호등대
묵호등대 앞, 논골담길에서의 일출
등대에서 반대편 길로 내려가면 ‘등대오름길’을 돌아볼 수 있다. 바다를 배경 삼아 그림을 감상하기 좋고, 골목마다 걸린 시를 읽으며 천천히 산책하기 좋다. 길 끝에선 출렁다리를 만난다. 다리를 걷노라니 오른편엔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마치 파도를 타는 것 마냥 넘실거린다.
누구의 삶도 그저 지나갈 수 없으리라. 한번 돌아보면 누군가에게는 온기를 줄 수 있단 걸. 다시 골목으로 향한다. 골목 사이사이 나긋나긋 들려오는 따스한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출렁다리
묵호 논골담길 가는 길
열차
무궁화호 청량리역~묵호역 평일 6번, 주말 7번 운행(약 5시간 소요) 묵호역에서 도보로 약 23분 소요
버스
동서울종합터미널~동해시외버스터미널 하루 32회 운행(약 3시간 소요)
하차 후 32-1번, 21-4번 버스 타고 논골 입구 하차(약 20분 소요)
서울고속버스터미널~동해고속버스터미널 하루 23번 운행(약 3시간 소요)
하차 후 터미널 옆에서 21-4번, 32-1번, 21-4번 버스 타고 논골 입구 하차(약 15분 소요)
※ ‘걷기여행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매달 선정하는 걷기 좋은 길 10선 가운데 한 곳을 골라 소개합니다.
걷기여행길 10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종합안내포털(www.koreatrails.or.kr)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